극화된 삶과 그 전이에 대하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개인이 시스템으로 인해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많다. <조커>가 레퍼런스로 삼았던 <택시 드라이버>는 물론, <파이트 클럽>, <아메리칸 뷰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조커>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히어로 영화의 빌런을 이와 같이 묘사했기 때문은 아니다. ‘시스템 대 개인’을 한 장르로 봤을 때, 그 진부한 계보 안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조커>는 ‘삶과 극’의 경계에서 영리하게 제 몫을 해낸다.
조커의 삶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아서 플렉’은 자신의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희극이었다고 말한다. 찰리 채플린은 삶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한다. 언뜻 희극과 비극이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현실의 삶은 늘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벌새>가 그렇고 <로마>가 그렇다. 그래서 삶에 희극적이나 비극적 요소는 있어도 삶 자체가 희극이거나 비극일 수는 없다. 즉 희극과 비극은, 어떠한 감정의 일방적인 배제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다. 따라서 ‘조커의 삶은 희극인가 비극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불행하다. 둘 모두가 현실 세계와 유리된, 말 그대로 ‘극화(劇化)된 삶’이기 때문이다.
극화된 삶을 염두하고 재진술하자. 아서 플렉은 자신의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희극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극화된 삶의 변주일 뿐이다. 찰리 채플린은 삶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한다. 비정상적인 거리에서 목도한 삶은 어느 극단만을 비출 뿐이다. <조커>의 결말부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라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단순히 그 방식이 통념상 금기시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극을 살아오던 아서 플렉은 (가면을 벗는 게 아닌) 조커라는 가면을 씀으로써 희극으로 옮겨간다. 이 희극이 비극의 진정한 해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희극과 비극의 본질이 같다고 해서, 아서 플렉의 변신이 무의미한 전이는 아니다. 희극과 비극의 가장 큰 차이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다. 세계에 대하여, 비극은 무겁고 희극은 가볍다. 비극은 자신 앞에 주어진 세계를 가장 엄숙히 받아들이는 반면, 희극은 그 모든 게 농담이라는 듯 웃어넘긴다. 자아에 대하여, 비극은 가볍고 희극은 무겁다. 비극에게 자아는 엄숙한 세계를 견뎌내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는 희극에는 자아가 그 무게를 대신한다.
<조커>에서 세계는 시스템이다. 영화 내내 시스템은 정치, 언론, 방송, 복지, 시민 사회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드러난다. 이 땅 위의 모든 존재에 불가항력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시스템은 중력과도 같다. 비극을 사는 아서 플렉은 누구보다도 이 중력을 강하게 느낀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허리는 시종 구부정하다. 중력에 짓눌린 그의 자아는 실체 없는 망상들의 연속이며, 발작적인 웃음으로만 가득 차 있다. 반면 희극을 사는 조커는 누구보다도 이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이제 새처럼 가볍게 걸으며 허리를 꼿꼿이 편다. 그리고 그에게 망상을 심었던 대상들을 차례로 죽이며 무거운 자아를 채워 나간다. 조커가 된 이후에 발작적인 웃음이 사라지고 안정된 미소(정말 안정되었다. 아예 분장으로 미소를 각인했기 때문에)를 가지게 되는 것도 무거운 자아의 방증이다.
아서 플렉은 광대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웃기지 못하는 광대였기 때문에 인정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실제로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하는 과도기에서, 그는 사람들이 광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낀다.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여전히 가벼운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커는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 정치적이지 않다. 조커를 위시하여 수많은 추종자들이 과격한 시위에 동참했지만, 그 추종자들이 아니라도 조커는 조커로서 존재한다. (사족: 이런 이유로 조커가 경찰차 보닛 위에서 군중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장면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조커가 추앙에 도취되어 몸짓을 보였다기보다, 자신의 팬들에게 작은 서비스를 해준 것이라 믿고 싶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인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 둘이 늘 대항하는 모양새라고 보기 어렵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늘 자신의 적을 만든다. 이렇게 보면 세계가 무거운 자아의 탄생을 돕는 것이다. 반대로 세계를 유지하고 지켜내는 것이 자아실현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세계를 무겁게 느낄수록 자아 또한 무겁게 느낀다. 앞서 말했듯 <조커>는 ‘시스템 대 개인’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조커>가 강조해서 조명한 것이 세계와 자아의 대립일 뿐, 그것을 유일한 관계식으로 선언하려는 것은 아니다.
<조커>는 가장 만화적인 캐릭터를 이용하여 극화된 삶을 스타일리시하게 드러낸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그 삶은 왜곡된 것이기에, 조커를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 삼을 수는 없다(마치 우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롤모델로 삼지 않듯). 그러나 세계를 보다 가볍게, 자아를 보다 무겁게 느끼게 되는 비극과 희극의 전이에서, 우리는 시스템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계기를 마련한다. 참된 거짓은 우리에게 ‘거짓’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참됨’을 호소한다. 위대한 영화가 그렇고 <조커>가 그렇다.
19.10.06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