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성우 매니저로 지낸 이야기-1

그땐 그랬지

by 빵주

때는 바야흐로 2015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가장 먼저 내정을 준 일본의 대형 기획사에 취직했다. 그 당시 대형 EC 기업에서도 내정을 받아서 그쪽으로 입사하려다가, 기획사 임원이 바짓가랑이 붙잡아서 마음을 돌리게 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고.



내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1도 모르던 시절, 그저 1. 재밌어 보여서 2. 내정이 빨리 나와서 3. 임원이 바짓가랑이 붙잡아서 4. 합숙면접까지 포함해서 7차까지 시험을 본 게 아까워서

등의 이유로 안일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던 것이다..... 미친 게지.


어느 정도 힘들 거라는 예상은 하면서도, 그래도 재밌지 않을까? 어쩌면 한국과 관련된 큰 일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도 같다. 꽤나 일찍 내정을 받았기 때문에(2014년 4월 내정) 입사날인 2015년 4월 1일까지 내정자들끼리 나름 친하게 지내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같이 디즈니씨도 갔었다. 물론 중간에 더 좋은 회사에 합격해서 (지상파 방송국) 이탈한 배신자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학생이었던 우리는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잘 지내냐고? 연락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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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름의 끈끈한(줄 알았던) 동기애를 뽐내며 내 생일인 4월 1일 무사히 입사식을 마쳤더랬다. 이 업계가 그런 건지 이 회사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각종 양아치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신인들은 한동안 정장을 입고 다니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장에서 심부름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발발거리고 뛰어야 하는데, 굳이 정장에 구두를 신기는 것도 참 꼰대스럽다. 여하튼 저 튼 나는 불편한 복장 극혐러이기 때문에 정장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취업활동 때 쓰던 아주 심플하고 노멀 한 아오키의 슈트를 적당히 돌려 입었다. 입사 첫날은 별거 없었다. 너희들을 환영한다! 는 회사의 새빨간 거짓말을 잔뜩 듣고는 빠질 수 없는 동기들과의 술 한잔.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내가 입사한 기획사는 당시 한 달가량 연수기간을 두었는데, 3일씩 각 부서를 돌면서 도대체 여기가 뭐 하는 곳인가를 보라는 취지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연수기간 중에는 다들 신입사원을 "손님" 취급하기 때문에 당연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때 어떤 순서로 각 부서를 돌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중간에 정말 힘들었던 날 하루는 정확히 기억난다. 동경 외곽 쪽에 있는 드라마 촬영 스튜디오에 가서 견학을 하고 오면 되는 아주 간단한 미션이었으나, 거지 같게도 그날은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그냥 쏟아지는 게 아니라,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 비였다. 우산은 무용지물이었으니, 4월 중순인데도 훅 떨어진 기온에 덜덜 떨 뿐만 아니라 아오키에서 세트로 싸게 산 신발은 완전히 빗물에 다 젖어서 스타킹과 맞물려 찌그럭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오죽하면 견학온 나를 보고 선배 사원이 오늘은 적당히 둘러보고 얼른 집에 가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돈이라곤 나올 구멍이 없는 사회 초년생, 입사 한 달 차였지만 그날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쌩고생을 하며 비바람을 뚫고 현장에 갔는데도 어디 한 군데 마음을 둘 곳이 없이 (그도 그럴게 그 당시 현장에 있던 선배들도 다 나를 처음 보는 거기 때문에) 깍두기처럼 쭈그려서 촬영을 지켜보자니, 그게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괜스레 눈물이 나면서 집 가는 택시 안에서 한숨을 푹-푹 쉬었던 게 생각난다.


순탄치 않은 나의 사회생활의 예고편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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