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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베를린의 사랑방, 슈패티

베를린에서 새로고침 중

by 이나

베를린에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여름날 낭만을 책임지던 슈패티의 시즌도 끝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슈패티(Späti)는 독일어로 ‘늦은 구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미니 슈퍼마켓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한국의 편의점처럼 품목이 다양하진 않지만, 담배, 맥주, 음료, 과자 정도는 구비가 되어있다. 동베를린에서 이민자들이 시작했던 커리부어스트나 게뮤즈 케밥처럼 슈패티도 베를린에서 출발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베를린에만 슈패티가 1,000개 이상이나 된다고 하니 조금 과장해서 거의 블록마다 하나씩 슈패티가 있는 셈이다.


이곳 슈패티에서 즐기는 맥주는 한국의 야장이나 편의점 노상과 닮아있다. 다만 야장보다 저렴하고 안주를 시킬 필요가 없으며(안주가 있지도 않지만), 편의점에 비해서는 훨씬 간소한 매력이 있다. 대부분의 슈패티는 바깥에 테이블과 의자를 구비해두는데, 맥주를 사서 바로 자리를 잡고 마시다 보면 그 공간이 어느새 작은 사랑방이 된다.

슈패티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맥주 한 병이 1.5유로에서 3유로쯤이니, 세 병을 마셔도 5~10유로면 친구들과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로 불리는 베를린스러운 문화인 듯 싶다.


슈패티의 또 다른 소소한 재미는 주변 사람들과의 뜻밖의 교류다. 허름한 테이블에 앉아 친구와 하염없이 수다를 떨다 보면, 옆자리 사람들이 의자를 빌리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기도 하고, 홈리스가 다가와 잔돈을 달라고 말을 걸기도 한다. 심지어 독일어로 하다가 못 알아들으면 능숙한 영어로 "Do you have some spare coins?"라고 요청하는 정성까지 보여준다. 한번은 옆 테이블에서 담배를 빌리러 왔다가 어찌저찌 대화를 트게 되었는데 어느새 주변 맛집 추천을 줄줄이 받았던 기억도 있다.


맥주를 마시다가 친구와 대화 소재가 떨어져간다 싶으면, 슈패티에서 카드 한 통을 사서 게임을 시작해도 좋다. 한 테이블에서 카드 게임이 시작되면, 그 기세가 삽시간에 번져나가 주변 테이블까지 전부 카드를 사와 게임 삼매경에 빠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약간 PC방에서 누구 하나가 짜파구리 주문하면 냄새 때문에 너도나도 주문하는 현상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베를린의 이 사랑방 슈패티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맥주를 한두 병 마시다 보면 날도 분위기도 좋아서 이 취기를 계속 유지하고는 싶은데, 화장실이 없어 맥주를 더 마시지 못 하는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처음엔 최대한 참아왔지만, 이제는 요령과 두꺼운 낯짝이 생겨서 가까운 바 화장실에 잠시 (몰래) 신세 지는 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젊은 남자들은 으슥한 곳에서 노상방뇨로 해결하고는 한다.


이런 소박한 낭만도 날씨가 추워지면 끝이기 때문에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자 마감효과인지 무엇인지 슈패티에 사람들이 더 늘어난 기분이다. 사라질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은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나의 베를린 첫 해 여름은 슈패티가 8할은 책임진 느낌이다. 내년에는 슈패티에서 고스톱을 칠 수 있도록, 이번에 한국에 들르면 화투를 좀 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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