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네가 했던 말 나 잘 생각해 봤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줬다니
정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린 좋은 친구잖아. 그렇지?
늘 널 보면 내가 남자가 되면 너 같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너랑 나는 공통점이 참 많잖아.
느긋한 성격, 유머감각, 음식 취향.
너랑 얘기할 때 나랑 비슷한 점이 많아서 깜짝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우린 얘기도 잘 통하지.
전화기를 붙잡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끊임없이 얘기하곤 했으니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고 아끼는지
너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너는 책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지.
너를 통해서 알게 된 좋은 책이랑 음악, 영화도 많아.
내 대학 생활을 돌이켜 보면 너 없이는 설명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넌 늘 내편이었지.
가끔 친구들끼리 의견이 달라서 투닥거릴 때 넌 늘 내편을 들어줬어.
우린 같이 영화도 보러 갔었지. 너 그거 기억나?
영화를 한참 보다가 옆에서 코 고는 소리에 놀라서 보니
네가 자고 있더라고. 어찌나 황당했는지.
그땐 살짝 화가 나기도 했었어. 아니 뭐 그냥 살짝.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기억난다. 한강 둔치 공원이었지.
난 그때 선약이 있어서 정장을 입고 있었어.
다들 자전거를 타기로 했는데 넌 내가 정장을 입고도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늘 말했지.
참, 내 여성학 수업 숙제도 네가 도와줬었는데.
아니, 아니, 넌 이런 내 얘기 듣고 싶지 않겠지.
내가 뭐라 말해야 할까.
나, 난 말이지 너를 어느 정도는 잘 안다고 생각해.
네가 꿈꾸는 미래, 그리고 미래의 너의 가족
우리 그런 얘기도 많이 했었잖아.
난 네가 어떤 가정을 꿈꾸는지 잘 알아.
아니라고? 그럼 내가 한번 말해볼까?
넌 네가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할 거야.
그 여자 역시 너를 사랑할 거구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어울리는 한쌍이겠지.
너는 일하다가도 한 두 번쯤은 아내와 통화를 하겠지.
넌 자상하니까 저녁에 간단한 장을 봐오거나 맛있는 야식거리를 사 오기도 할 거야.
네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네 아내는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널 맞이할 거야.
부엌에선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고 식탁에는 정성스럽게 차린 반찬들이 놓여 있겠지.
참, 아이들을 잊을 뻔했다.
네가 집에 오면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너를 환영하겠지.
머리를 곱게 딴 여자아이도 있고 볼이 붉고 건강한 사내아이도 있을 거야. 너희 가족은 한 자리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겠지.
아이들이 숙제를 하러 가면 너희 부부는 간단히 와인을 마시며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거야.
이번 달 보너스가 나오면 뭘 할 건지, 만기 된 적금을 타면 어디로 가족 여행을 갈 건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겠지.
넌 예의 그 유머 감각으로 네 아내를 웃게 할 거야.
이제 곧 밤이 되고 너희 부부는 아이들을 재우고는
사이좋게 잠자리에 들겠지.
어때? 네가 꿈꾸는 미래의 가정이랑 비슷하지?
너무나 비슷해서 깜짝 놀랐니?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널 어느 정도는 안다고.
그런데 상상해봐. 저 가족에 내가 낄 자리는 없어.
나는 절대로 저 이야기 속의 네 부인은 될 수 없을 거야.
난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고 싶지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싶진 않아. 난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도 알잖아.
정말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난 네가 나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줄만 알았어.
내가 널 생각하듯이 말이야.
이 말을 들으면 넌 날 다시는 안 보고 싶겠지.
그러면 난 널 잃게 되는 걸까?
그냥 전처럼 날 좋은 친구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왜, 왜 나한테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말한 거야.
내가 싫다고 할 줄 정말 몰랐니?
내 행동이 널 헷갈리게 했니?
널 사랑하지 않으면 난 니 옆에 있을 수 없는 거니?
난 널 잃는 게 너무나도 두려워.
하지만 너를 한 남자로 보지 않으면서 널 사랑한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어. 이런 나라서 정말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