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화장실 급해서 먼저 갈게."
"알았어. 괜찮으니까 잘 내려가서 기다려."
아들을 먼저 내려보내고 나는 스키를 타는 게 아니라 스키를 신었지만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스키장의 중간도 내려오지 못하고 나의 다리는 후들후들 거렸다. 몇 번을 넘어지고 갓길에서 쉬면서 겨우 몇 미터씩 내려올 수 있었다. 이렇게 내려오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흘러서 오후 폐장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내 뒤에 오는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보이지 않았다. '스키를 벗고 내려갈까?'잠깐 고민을 했지만 스키장에서 스키를 벗은 발은 걷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위험하기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옆으로 옆으로 다리를 옮기는 순간 내 앞을 쌩~하고 멋지게 보드가 지나갔다. 그런데 나처럼 엉거주춤 스키를 타던 사람과 순간적으로 앗! 부딪히고 말았다. 스키를 탄 사람은 스키가 벗겨지면서 빙그르르 돌아 반대쪽 벽에 쳐 박혔고 보드탄 사람은 옆으로 넘어지면서 내 앞쪽으로 밀려왔다.
나는 그 사고 장면을 보는 순간 너무 놀라서 정지 화면처럼 멈춰 서 있었다. 어디선가 '스키를 벗고 그 자리에 빨리 주저앉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스키를 탄 사람은 다리를 다치고 보드를 탄 사람은 팔을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패트롤이 출동해서 다리 다친 환자를 먼저 싣고 내려갔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보드사고로 앉아있는 사람 뒤에서 슬그머니 스키를 벗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다음 패트롤이 도착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낮은 자세와 애절한 눈빛을 발사했다.'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차마 말은 못 하고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 맘을 알아차린 패트롤이 한 마디 했다.
"이거 타고 내려가실 거죠?"
"네."
나는 패트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하고 후다닥 구조스키에 올라탔다. 지금까지 살면서 타인에게 그날의 눈빛만큼 간절한 눈빛을 보낸 적은 없었다. 그 짧은 순간 '지금 살아 내려가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정말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했던 기억이 난다. 구조스키에 올라탄 나는 얼굴을 비닐 속에 숨기고 내려오다가 어느 순간 루돌프가 끄는 썰매가 이런 기분일까 하면서 주변을 살피면서 즐기게 되었다.
내려오지 않는 나를 걱정스럽게 기다리던 동료들과 아들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엄마. 어디 다쳤어?"
부상자가 타는 구조스키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들과 동료들이 물었다.
"안 다쳤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썰매를 끓어준 패트롤이 부상자를 싣고 임시 의료소까지 달려가는 뒷모습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십 번했다.
내가 구조스키를 탄 사연은 지금까지도 즐거운 이야기로 회자되곤 한다.
"멀쩡한 몸으로 구조스키 타본 사람 나와봐."
그날의 공포를 나만의 에피소드로 승화시키고 있지만 15년 전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스키장에 오지 않았다. 그날은 삶에 모든 것에 감사하고 겸손애야 함을 배우는 날이었다.
15 년 만에 스키장을 지나오면서 딸이 태어나기 전에 이곳에서의 추억을 공유했다. 이 번에는 남편의 일정에 묻어온 여행이라서 호텔과 카지노만 즐기고 돌아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야경도 볼만하다. 호텔 안내 로봇과 딸은 친구가 되었다. 딸이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즐거워했다. 나는 가볍게 남편과 맥주 한 잔 한 하면서
강원도 여행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