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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Sep 24. 2023

엄마의 냉장고


장마는 끝났지만 무너진 뒷산의 복구 계획이나 상세한 안내는 없다. 기다리다가 문의한 시청의 답변은 중앙에서 내려온 예산이 우리 지역에 1억 정도인데(기가막힘) 공사 설계비 정도도 안 된다는 설명이었다. 결론은 올 해는 아무 조치도 못 해준다는 뜻이었다. 산 주인과의 절차도 남아있고 다음 장마 전까지 대책이 나올지 의문이다.

무너진 산은 그렇다 치고 유실된 창고나 보일러실은 대장에 올려진 것이라도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규정에 대한 설명을   엄마는 한 번 더 실망해야 했다.


건물이 사라진 것도 난감한 일이지만 그 속에 물건들도 모두가 안타운 것들이었다.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일러, 벼도정기는 물론  엄마의 고된 노동으로 모아놓은 고추, 콩, 쌀, 참깨, 들깨, 참기름, 들기름, 마늘, 양파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을 모두 잃은 것이다.


"엄마목숨랑 바꿨다고 생각하면 아까울 것 하나도 없어. 너무 속상해 말아요."

"건 그런디 살고 보니 그것들이 또 아까운 마음에 속이 상네.  람맘이 간사하다."


일단  수도, 전기를 임시로 연결하고 파손된 정화조  공사를 대충 해서 화장실을 쓸 수 있도록 막내 동생 친구들 동원해서 일을 처리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집을 청소하고 냉장고에 썩은 음식을 버리고 세탁기도 연결했다. 떨어지고 틀어진 문짝을 수리하고 나서 엄마는 대피했던 마을회관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이 최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단체톡에 막내 동생의 글이 올라왔다.

"엄마 김치냉장고 고장~ 바꿔야겠어~ 세탁기도 오늘내일해서 바꾸는 걸로..."

"정리할 때 불안 하더라. 지난번에 청소할 때 거기 밑에 뭐가 자꾸 빠지기는 하더구먼..."

"어~ 아예 열리지도 않아. 일단 집에 올라가서 회원가로 알아볼게."

"회비는 있는 거야?"

"회비는 있어. 걱정 마."

4남매가 꼬박꼬박 엄마를 위해 모으는 회비로 입하기로 했다.


"냉장고 크기 잘 보고 수납 잘 생각해서 선택해."

계절마다 나오는 채소로 장아찌등 밑반찬을 만들어 놓는 엄마의 냉장고는 수납공간 중요했다.

"엄마는 크던 작던 무조건 꽉 차게 넣지."

"나도 그래. 냉장고에 생수만 넣고 살아보는 게 소원이다."

"엄마 닮았구먼 안 버리는 거ㅋㅋ ㅋ. 결국 다 버렸잖아. 먹어보지도 못하고..."

동생의 농담 같은 진담에 나도 모르게 훈계가 시작되었다. 깔끔한 동서가 며느리 입장에서 했던 얘기 일 수도 싶다는 생각에 약간 기분이 상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나도 시누이였음.)


"다람쥐가 겨울 준비를 위해서 본능으로 도토리를 모으듯이 없는 살림에 자식새끼들 키우느라 못 버리고 모으고 아끼면서 50년 넘게 살아서 그런 거야. 먹을 거 떨어지면 우리들 굶을까 봐 전전긍긍 살던 그 습성이 남아서 그런 걸 우리는 알아야지. 그러니 뭐라 말어. 버릴 때 버리더라도 그냥 조용하게 버리고 다시 채워주는 것이 죽기 살기로 먹여 살 자식들이 하면 되는 도리야. 다른 엄마는 모르고 울 엄마는 그렇다."

갑작스러운 나의 훈계에 톡방 썰렁해진 것을 느꼈다. '이것이 분싸?'

"갑자기 좀 서당선생님 같은가? 엄마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삶을 선택했다면 우린 진즉에 엄마 없이 살았을 거다. 알았냐? 동생들아."

 "ㅋㅋㅋㅋ 알써."


남편을 보내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있었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엄마였다. 힘든 살림에 우리에게 눈물 한 번 보이지 않고 혼자서 4남매를  키워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왜, 엄마 팔자 닮았냐?'라고 우시던 엄마를 잊을 수가 없다. 초처럼 강하게 키웠지만 남편에게 사랑받고 보호받는 꽃으로 살기를 바랐던 딸의 인생이었을 것이다. 이런 아픈 일을 겪는 것이 처럼 키우지 못한 부모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원망하며  흘리는  회한의 눈물 같아서 내 마음은 더 찢어졌다.

"엄마, 내 걱정하지 마요. 막내가 어린것 빼고는 나는 직장도 있고 큰 빚도 없으니 아빠 돌아가셨을 때보다 내 사정이 훨씬 나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엄마의 낯선 눈물 앞에 죄인이 된 것 같다.

엄마 딸은 엄마 닮은 것이
후회스럽지 않아요.
나도 냉장고를 가득 채워 가면서
삼 남매랑 잘 살게요.
 엄마,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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