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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과 까치밥

by 앞니맘


평소 같으면 8시까지는 잘 수 있는 토요일 새벽에 눈을 떴다. 긴장하고 잠자리에 들어서 인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깼다. 딸이 깰까 봐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살금살금 욕실로 들어갔다.


법인에서 신도들과 성지순례가 잡혀 있어서 교사들도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전남 고창 도솔산 선운사가 목적지다. 사실 약간의 강제성도 있었고 남편의 2차 전시회가 열리는 곳 방문을 포기하고 떠나는 여행이라서 나는 피곤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지난주부터 공개 수업 등 주말에 행사가 이어져서 선생님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차피 가는 길 즐거운 마음으로 가자.'라고 교사들에게 말했으니 나도 그래야 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버스에 올라오는 나를 보고 벌써 차를 타고 기다리던 선생님들이 밝게 맞아 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오랜만에 타보는 리무진 관광버스가 맘에 들었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는 내 고향을 지나고 가을을 점점 거슬러 오르는 기분으로 남쪽을 향해 달렸다.


우리가 탑승한 3호차는 법인의 유치원 어린이집 교직원들만 있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속삭이기도 하고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하면서 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모자라는 잠을 채우기도 하고 간식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음악도 맘껏 들었다. 기사 아저씨가 임의적으로 틀어준 임영웅의 노래와 영상을 보다가 그의 목소리에 요한 매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임영웅의 노래를 몰아 들어 보기도 했다.


7시에 출발해서 2시가 다 된 시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변산해수욕장 근처에 우럭 매운탕집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세팅이 되어 있었다. 허기가 반찬이었는지 매운탕이 맛있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식당 한편에 다양한 라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라면 한 개 끓여서 같이 먹으면 좋겠다."

어린이집선생님 한 분과 같이 간 남자 기사님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라면은 단체 손님은 제외입니다."

잠시 후에 종업원이 와서 알려줬다.

"몰랐어요. 끓이던 라면은 어쩌죠?"

어쩔 줄 몰라하면서 선생님이 종업원에게 말을 했고 그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은 라면을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끓이던 것은 끓여서 드세요."

종업원의 말에 교사는 라면을 계속 끓이고 있었다.


밥을 한 숟가락 뜨고 있는데 등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왔다. 맞은편에 앉은 교사들의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고 나도 곧 뒤를 돌아다보았다. 여자사장 같은 분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진열대 위에 라면을 모두 봉지 속으로 쓸어 넣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몸짓, 라면을 집어넣는 손길에서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장 뒤에서

라면을 뒤적거리던 집게를 들고 뻘쭘하게 서 있는 어린이집선생님의 표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나서 속에 있는 말을 뱉을 뻔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어린이집 원장과 황당한 눈빛을 교환했다.


"밥 맛이 싹 사라지네."

나와 똑같은 심정의 허쌤이 먼저 숟가락을 내려놨다.

"뭐지? 우리가 라면값도 없어 보이나? 저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는 사정이 있겠지?"

나도 숟가락을 놓으면서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당장 식당을 나가고 싶었지만 다시 마음을 바꾸고 말했다.

"앞에 편의점 있던데 가서 라면 사줄게 그래도 돈 냈으니까 밥은 먹자."

어른들도 많고 스님도 계셔서 행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나갈 때 라면 두 개 인 값 주고 가자."

만원을 꺼내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식사를 맞췄다.


식사가 끝날 때쯤 입구에서 라면 얘기로 언성이 높아졌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남자 신도가 라면값을 주면서 불쾌했음을 밝혔다.

"끓여 먹지 말라고 쓰여 있는데 왜 끓여 먹어요."

여자사장의 말이었다.

"제대로 써 놓던지요. 단체가 왔으니까 미리 말을 했어야죠. 그러니까 라면값 얼마인지 받으시고 이런 식으로 장사하지 마시라고요."

남자신도분의 언성도 높아졌다.

"아닙니다. 라면값은 안 주셔도 됩니다."

남자 사장이 나서서 미안하다는 말과 오해가 있던 것 같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나 돈 굳었다. 아이스크림 사줄게."

꺼내 놨던 만원을 다시 지갑에 넣고 아이스크림가게로 향했다. 마음은 씁쓸했지만 아이스크림 맛은 달콤했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가을을 찾아 나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직 단풍나무의 빛깔은 초록이 많았다. 간간이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고 강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하면서 8시간 만에 도착한 선운사를 겼다.

'억지로 라도 나오니까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참배를 끝내고 선운사 대웅전 앞 감나무 아래 모여 앉았다. 스님은 선운사의 창건 이유와 역사적 배경을 간단하게 설명하시고 말을 이어 가셨다.

"우리 조상들은 배려에 대한 좋은 마음이 있습니다.

소달구지를 끌고 가던 농부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친 소를 위해서 등에 짐을 나눠 메고 걸었고 저기 저 감나무처럼 까치를 위해서 감을 남겨두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한 여러분은 이 좋은 마음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셨으면 합니다."


라면 한 봉지에 팍팍해졌던 마음이
까치를 위한 배려가 넘쳐나는 감나무를 보면서 말랑말랑 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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