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던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멋졌던 날이 언제였어?"
"글쎄 언제였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첫 월급 타서 가족들에게 한 턱 쏜 날? 결혼 한날? 아이들이 태어난 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각해 보니까 매번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해 봤다. 가장 힘들었던 날은? 가난해서 자유복 대신 교복을 입고 싶었던 학창 시절? 원하는 대학을 떨어졌던 날? 아빠가 돌아 가신 날? 큰 아이가 대학에 떨어진 날?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소송을 시작한 날? 시간이 흘러가서 인지 잘 헤쳐나가고 있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18년을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언제니?”
“글쎄 별로 없는데... 사춘기 때 내적 갈등?” 하고는 피식 웃는다.
“그러면 너는 행복했던 거네.”
“그런가? 그러면 엄마도 행복했네.”
“그러네. 나는 행복합니다. 너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하하하하”
그런데 바로 며칠 전 10월의 어느 날에 전화가 왔다. 50년을 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날이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했다.
"현아 별일 없지? "
"어,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옆에 누구 있어?”
“없어, 아직 퇴근 안 했어. 사무실이야.”
“다른 게 아니라 엄마가 네 통장에 돈 쪼끔 보냈어.”
“돈? 내 통장에? 무슨 돈?”
“아니, 빚도 다 갚고 조금씩 모는 돈인데 너 뒀다가 써.”
“어? 나 돈 많아 걱정 말고 엄마나 다써..”
“아냐 너한테 해준 것도 없고 사위도 고맙고 해서 주는 거야.”
“엄마가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다니면서 힘들게 번 돈을 내가 왜 써? 엄마보다 내가 돈 더 많을걸?”
“너 돈 없어서 주는 거 아니야. 그럼 뒀다가 애들 등록금이라도 써.”
“나는 엄마 용돈도 못 주는데 뭘 써. 엄마 어디가? 병원에서 죽는데?”
“하하하 안 죽어. 너 고생만 시켜서 주는 거야. 끊어.” 뚝~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보내셨다는 거지?' 통장을 열어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1,000만 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엄마보다 몇 배의 월급을 받아도 저금은커녕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하는데 엄마는 이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일을 하신 건가?'
얼마 전 친정에 갔을 때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파에 옆으로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던 엄마는 너무 작았다. 3인용 소파가 남을 정도로 작아진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내 딸이 엄마께 물었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작아?”
“늙으니까 자꾸 작아져서 그래.”
“원래는 컸어?”
“원래도 작기는 했는데 할머니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못 먹어서 다 작았어.”
이런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 동생이 끼어들었다.
“옆 집 숙자 엄마랑 윤정이 엄마는 엄마보다 훨씬 크기만 하고만 애한 테 거짓말을 하고 그려?”
"그런가?"
엄마의 쿨한 대답과 남동생의 팩트체크에 나는 울려다가 웃어 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 작은 몸으로 평생 힘든 농사일을 하셨다. 지금까지도 충청도 집에서 경기도 어디까지 다니면서 잡초를 뽑고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밤을 줍고 공공근로를 다니면서 쉼 없이 일해서 모은 돈을 무소유를 실천하는 스님처럼 욕심을 털어 내듯 내게 던져 주셨다.
우리 엄마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적어놓고 배우시며 마음을 달랬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는 강한 엄마다. 4남매를 엄마에게 맡기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엄마가 보여준 부지런함과 강한 책임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장학금을 타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존감 높게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엄마의 도전 같은 삶에서 배운 것이다.
우리 엄마는 빚을 제일 무서워한다. 아빠는 선진 농업인이었다. 무엇이든 처음 하는 농사를 시범적으로 하셨다. 담배, 단호박, 옥수수, 약초를 재배하셨고 사루래라고 기억하는 수입소를 키우기도 했다. 나는 아빠를 도와서 호박 고깔을 만들고 옥수수 곁순을 따고 누렁 잎담배를 새끼에 엮는 일을 도우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농사만 지으면 빚으로 돌아오던 시절에 엄마 소원은 빚 없이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카드를 처음 만들었을 때 빚이라고 큰일 난다고 걱정스럽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나머지 동생 셋은 아직 학생이었다. 아이넷과 농협 빚만 남겨두고 돌아가신 아빠를 엄마는 원망하지 않으셨다. 애들 잘 가르치고 빚다 갚아야 한다는 목표만 보였다고 한다. 새벽같이 공장에 가서 일하시고 6시에 퇴근하시면 밭과 논일을 하셨다. 새벽 4시가 엄마의 기상시간이었다. 그렇게 원망보다 목표를 향해 인내하시며 사셨다.
우리 엄마는 우리에게 당당하셨지만 미안해하셨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 엄마가 된 이후로 엄마 자신을 위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셨다. 내가 첫아이를 낳고 엄마는 1주일 공장에 휴가를 내고 오셔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1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시는 엄마께 말했다.
"엄마 공장에 전화해서 1주일만 더 쉰다고 하면 안 돼?"
"안돼, 갑자기 그러면 공장도 문제 생겨."
하면서 떠나시는 엄마를 보면서 '다른 집처럼 나도 엄마가 더 해주면 좋을 텐데 돈이 딸보다 중요하구나' 생각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섭섭하고 우울했다. 그 뒤 몇 년 후에 동생이 아기를 낳고 엄마는 공장을 그만두시고 동생네 입주 육아를 하셨다.
"네 애들을 봐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희네는 봐주려고 마음먹었었어."
“아니야, 우리 집은 너무 멀고 갑자기 공장을 그만둘 수도 없었잖아.”
“희네만 봐준다고 섭섭해 마라.”
“엄마는 별소리를 다해. 동생이 가까운데 사니까 그렇지. 엄마 용돈 많이 주라고 해야겠어.”
동생네 아이들을 키워주면서도 주말에는 집에 와서 농사일을 하셨다. 조카들을 키우면서 몸무게 40킬로가 넘었다고 좋아하던 엄마 모습이 생각이 난다. 새벽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일하느라 축적될 에너지가 없던 엄마의 몸에 조카들 육아에 쓰고 남는 에너지가 생긴 것이었다. 엄마의 몸무게가 40킬로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산후 조리로 섭섭했던 내가 너무나 미웠다.
나에 엄마로 50년 넘게 온 힘을 다해 오르고 올라 가난과 빚을 벗어나고 마지막 고지에 다다른 엄마가 그 목표에 도달한 기념으로 툭 던지듯 무심하게 보내준 1,000만 원이다.
내가 예전의 내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아이들 키우면서 산다는 게, 돈을 모은다는 게, 빚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의 먹먹함은 더 했다.
저녁에 퇴근해서 남편에게 얘기를 했다. 남편이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너머로 틀니를 뺀 엄마의 어눌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는 젊어서 일찍 틀니를 하셨다. 엄마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인생의 표시이기도 하다. 엄마 뼛속까지 다 빼먹고 자란 4남매 때문에 틀니를 했고 이제 통장잔고까지 다 빼주시려고 한다.
지금 나는 엄마를 찍은 영상을 보고 있다. 손녀딸에게 볏짚으로 새끼줄 꼬기를 보여주던 엄마의 신나는 목소리보다 엄마의 거칠고 거죽만 남은 손만 보인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떠나 버릴까 봐 말 못 하는 짝사랑 연인도 아닌데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고 50년을 넘게 보내고 있다. 내 딸이 나는 100살 200살 살 수 있다고 믿듯이 나도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닐까?
아닌 걸 알면서도 강하고 씩씩하게 계속 내 곁에 있을 것 같아서 소홀한 걸까? 이제 더 이상 아끼지 않고 말하려고 한다.
엄마 정말 고맙습니다. 엄마 딸이어서 자랑스럽습니다.
엄마가 주신 1,000만 원은 어느 젊은이의 퇴직금 수십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가치 있는 돈입니다.
엄마 몸은 3인용 소파보다 작지만 네게 엄마는 이 세상 전부 보다 큰 엄마입니다.
엄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