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필요해서 대출을 받으면서도 중도 해지를 못한 적금이 있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해지할 경우 손해가 많은 보험성 적금이었다. 그 적금이 드디어 만기가 되었다.
이미 쓸 곳은 정해져 있지만 은행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재판을 포함해서 아이들 등록금까지 곧 들어가야 할 돈이 많아서 잘 보관하자라는 생각을 하고 은행에 도착했다.
대부분 은행업무는 인터넷이나 앱을 이용해서 처리하다 보니 은행 대기 의자에 앉아서 내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이용하고 있었다.
까똑~
"뭐 해?"
"은행에 저축하러 왔다."
친구는 요즘 같은 세상에 대출이 아니라 저축이라니 부럽다고 했다.
"카드값에 대출 얘기 들으면 과연 부러울까?"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얼마인지 몰라도 촌스럽게 저축만 하지 말고 너를 위해서도 쪼끔 써라. 나한테 쏘면 더 좋고. ㅋㅋㅋ. 그 돈 모은다고 크게 행복과 불행이 바뀌지 않을걸?"
백번, 천 번 친구의 말이 맞았다. 이자라도 흥청망청 써보고 싶다는 마음속 맨 뒤쪽에 서 있던 욕망이 맨 앞으로 튀어나왔다.
엄마는 100만 원 모아서 이자가 10만 원 나오면 110만 원 저축하고 또 다음에는 더 모아서 200만 원을 저축하면서 우리를 키우셨다. 못 먹고 못 입고 가족을 위해서 살았던 엄마의 삶은 존경, 그 자체다. 엄마는 그 삶을 후회하거나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 희생과 노력으로 자식들을 무탈하게 키웠다는 것이 엄마에 가장 훌륭한 이력이 되었고 포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인생 드라마에 주인공은 나와 동생들 뿐이었다.
나는 엄마와 다르게 살고 싶었다. 아주 이기적인 삶을 꿈꿨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했다.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내 삶에서 엄마의 인생을 볼 때가 많다. 가끔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한다.
"1억인데. 다 쓸까?"
나는 친구를 놀려주고 싶은 생각에 희망금액을 알려줬다.
"깨갱. 삼천만 땡겨줘."
"띵동"
내 순서가 되었다.
"이 통장에 넣어 주세요."
마이너스통장을 내밀었다. 정리가 끝난 통장 잔고는 플러스로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움직였다.
단체미팅에 나가서 킹카가 내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며 앉아 있던 시간처럼 만기 적금도 잠깐의 설렘만을 남기고 결국 친구와 떠난 킹카가 되었다.
"저녁에 감자탕 먹자."
감자탕을 먹고 설빙에서 망고빙수와 떡볶이를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여기저기 침 바르지 말고 네 구역을 정하고 먹어. 아니면 덜어 먹던지.
거실에 앉아서 빙수를 먹는 남매들이 투닥거렸다.
1억이 들어 있는 통장이면 더 좋겠지만 이 정도의 행복도 감사하다.
살다 보니 마이너스 천 원이 어느새 백만 원, 천만 원 빚쟁이가 되어 있기도 하고 반대로 만원, 십만 원 모인 적금이 백만 원, 천만 원이 되기도 한다.
작은 행복을 조금씩 적립하다 보면 큰 행복적금을 타는 날이 올 것이다. 아니 그 소소한 행복적금이 마이너스 통장 같은 시련을 이겨내는 커다란 힘이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