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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Aug 04. 2024

아들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나 아닌 타인을 챙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남편은 다정다감하고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지만 무뚝뚝하고 예의 없는 아들도 아니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동생과 남편 모두  착하고 다정한 아들이다. 딸인 내가 친정엄마에게 보이는 모습보다 낫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만 어린 나이에 연재를 시작한 남편은 누구를 챙기는 것보다 챙김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일찍 경제활동을 시작한 아들에게 시부모님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 후에 시댁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명절이나 생신은 빼놓지 않고 챙겼다. 그런데 평일에 있는 기제는 한 번 참여하고 가지 못했다. 3시간 거리에 사는 우리가 왕복 6시간을 오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들이 원고 마감으로 바쁘고 며느리는 운전도 못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제사에 매번 참석할  수가 없다는 것을 시부모님도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매달 있는 제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막상 기대가 깨진  상황을 어머님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제사 때마다 참석 못해서 죄송하다고 전화를 하면 다른 집  며느리들은... 혼자라도 온다는 말과 마지막에 괜찮다고 냉랭하게 답하셨다. 전화를 끊으면서 내 팔자...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말이 나와 시어머니 모두에게 해당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제사에 다녀오자.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몸이 고된 게 날 것 같아." 

나는 한 달에 한 번 골로 돌아오는 제사가 야속했다. 차라리 가서 일을 하고 오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제삿날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남편대신 내가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가 억울했다.

"뭘 신경 써. 전화하지 마."

이해받는 아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는 아빠 제사, 엄마 생신 상 한 번 제대로 차린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직장 다니는 것은 이해받을 이유가 되지 못했다. 결혼 초부터 시할머니 생신, 시부모님 생신 상도 다 차렸고 명절 이틀 전부터 제사 준비하고 방학이면 1주일씩 가서 지냈는데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 제사 때 죄송하다고 자기가 전화해. 자기한테는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할거 아냐. 나는 안 할래."

그 뒤로 나는 제사에 못 가서 죄송하다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제사 때 날짜만 남편에게 알려줬다.

남편도 몇 번을 했던 거 같은데 그 뒤로는 챙기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시어머니는  제사에 전화 없는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나는 그냥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코로나를 계기로 제사를 지내는 방법과 횟수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지금은 시할머니와 남편의 기일을  내 방식대로  절에서 지낸다.


생각해 보니 내가 결혼했을 때 우리 시어머니 나이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다. 아들이 있는 입장에서 이해가 쉽게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당신들이 원하던 조신하게 시부모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 할  며느리도 아니었고 결혼과 동시에 아들과 통장까지 뺏긴 상황에서 내가 이뻤을 리 없다. 하지만 남편은 경제력이 있고 독립적인 여자를 선호했다. 부모님과 동상이몽이었다. 요즘 들어 내가 아니고 다른 며느리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두에게 좋지 않았을까? 결론은 없다. 그저 예나 지금이나 현재를 살뿐이다.


어머니에 대한 내 감정 한 곳에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마음이 숨어있다. 어머니도 다른 며느리와 비교했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적으로 어머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시댁에 가면 시할머니 끼니부터 내가 알아서 챙겼다. 친정 엄마는 남편에게 수 없이 많은 밥상을 차렸다. 나는? 기억이 없다. 남편이 떠나고 고맙다. 너뿐이다. 건강 챙겨라. 진심이 느껴지는 말씀을 하신다. 이제서 나를 인정하는 기분이다. 나는 그동안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았고 더 잘했는데 이상하다.


얼마 전에 담석 수술을 한 시어머니의 수술비를 처음으로 모른 척했다.  남편은 이 상황을 뭐라고 할까? 그동안 혼자 챙겼으면 됐고 도련님도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건강하시길 바랄 뿐이다.


곧 시아버님 생신이다.  토, 일 포함해서 여름방학 9일 중에 거의 모두를  딸에게 쓰고 며칠 남지 았다.  아이들이 모두 집에 모이는 날을 체크했다.

"곧 할아버지 생신인데 포천에 다녀오자. 엄마가 이 번 주밖에 시간이 없어." 


손주들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바쁘다. 어머니 전화가 고마울 때도 있고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가 될 때도 있다. 답답하고 서운한 마음을 절제 없이 쏟아 내게 될 까봐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내 마음의 흐름에 집중하고  어떤 의무감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가 핏줄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엄마라서 백번 이해할 수 있다.


오랜만에 가족이 시댁에 도착했다.

"손주들하고 밥 먹으니까 엄청 맛있다.",

텃밭에서 따간 복수박과 참외를 냉장고에 넣고 견과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잘 챙겨서 드시길 바란다.

"할머니, 할아버지 또 올게요. 건강 잘 챙기세요."

눈가가 촉촉해진 시어머니가 손주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뜨거운 폭염 속, 백밀러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들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다. 20년 넘게 아들 대신 며느리로 했던 챙김을 이렇게 조금씩 내려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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