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앞니맘 Oct 15. 2024

너무 빨리 철든  딸에게

일요일 저녁. 딸이 4박 5일 동안 영어마을 체험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쌌다. 캐리어를 꺼내 놓고 스스로 짐을 챙기는 딸을 보고 자니 다 컸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챙기면 되겠다."

딸이 가방을 펼쳐 놓고 내 옆에 앉았다.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 마스크도 챙기고."


작년 3월, 영어마을에 다녀온 후 독감에 걸렸었다. 독감 증상이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했다. 아빠를 보내는 악몽 같은 일을 겪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체험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딸이 가겠다고 나섰다. 학교보다 모르는 친구들이 있는 곳에 가고 싶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새 학년을 4월에 시작했다. 열이 나는 딸과 응급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기억이 났다.


독감 접종을 하기는 했지만 감기 걸린 친구 있으면 꼭 마스크 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감기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다녀오면 학교 숙제가 쌓여 있겠지?"

딸은 감기보다 숙제와 수학이 진도가 나가면 오빠한테 물어봐야 하는 단점을 설명했다.

"휴대폰도 못 쓰고 숙제도 많아지는데 취소하지. "

"아니야, 가는 게 장점이 더 많아."

딸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준비시간이 길어졌다.

"딸, 시간이 늦어서 엄마가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 오빠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 미안해."

딸을 끌어안았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드라마 너무 오래 보지 말고."

나를 안아주는 딸의 품 안이 편안했다. 나만큼 커버린 키와 긴팔은 편안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엄마, 편지 꼭 써."

현관을 나오는 나를 향해 딸이 다짐을 받았다.

영어마을 체험을 가면  학부모들이 편지를 쓰는 방이 있다. 그곳에 쓴 편지가 매일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딸은 편지 얘기를 어제부터 계속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하고 집을 나섰다.

딸에게 9시가 넘어, 출발한다는 문자가 왔다. 4박 5일 동안 별일 없으면 문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오후에 영어마을에서 입소가 끝나고 수업 중이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편지 생각이 났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아이디를 등록했다. 아들이 다녀왔기 때문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소중하고 귀한 딸에게
떠날 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지도 못하고 손도 흔들어 주지 못했는데 '응애~' 울지는 않았겠지?
출근 시간 때문에 늘 바쁜 엄마가 오는 같은 날은 조금 슬프다. 여유롭게 우리 딸과 아침을 보내고 학교도 데려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은 25년 전 큰오빠가 태어나고 둘째 오빠가 태어났을 때부터 했었는데 아직도 실천을 못 하고 있네. ㅠㅠ. 오빠들도 영어마을에서 즐거운 지내고 친구도 사귀고 왔으니 우리 딸도 즐겁게 보내고 와. 두 번째 갔으니 여유롭겠지? 휴대폰을 볼 수 없다니 엄마는 흐뭇하군. ㅋㅋㅋ. 아프지 않도록 건강관리 잘하라는 부탁도 잊지 말아 줘. 엄마는 오늘 퇴근하면 대청소할 거야. 그리고 일찍 잘 거야. 너도 일찍 자. 꿈속에서 만나자. 내일은 바쁜 일이 많아서 새벽에 일어나야 하거든. 엄마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힘이 되는 우리 딸 사랑해.'

짧게 편지를 등록했다. 등록이 완료되자 그동안 내가 썼던 편지 목록이 화면에 떴다. 10년 전, 아들에게 쓴 편지를 클릭했다.

귀요미 쭌아, 엄마가 바빠서 꼴찌로 편지를 올리는 것 같아 미안하다. 퇴근도 늦게 하고 정이가 이제 잠들었어. 정이는 작은 오빠가 없어서 이상한지 네 방에 가서 자꾸 두리번거린다. 아침밥을 할 때 네가 정이랑 놀아줘서 엄마가 쉽게 아침을 준비했는데 네가 없어서 힘들었어. 정이도 작은 오빠랑 같이 밥 먹다 혼자 먹어서 그런지  과일만 먹고 밥은 싫데.
아빠가 아침에 걱정하셨어. 잠은 잘 잤나? 코는 안 막혔나? 밥은 두 번 먹어야 하는데 눈치는 안 보나, 하면서 ㅋㅋㅋ. 비염 때문에 고생이 많을 수 있으니, 물을 자주 마시고 약 먹고 세척 잘해야 해.
집에서는 매일 동생과 형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엄마 잔소리 많이 들었는데 4박 5일 동안 즐겁게 지내고 만나자. 우리 아들 고맙고 사랑해.
너 대신 형이 정이 보느라 진땀을 찔찔... 형이 학원 시간도 바뀌어서 목요일까지 쭈욱 정이 봐야 한다고 너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정이는 강아지랑 계속  놀겠다고 떼쓰고 집에 들어갈 때 울고, 나올 때도 울었어.
"아이쁘다. 아이쁘다." 하면서 강아지를 열쇠나 가방으로 유인하지만 소리를 크게 질러서 강아지는 도망간다. 웃기지?
잘 지내면서 많이 배우고 올 수 있겠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사범님한테도 연락이 왔었어. 잘하고 오라 전해달래. 준이는 what? 은 잘한다고 ㅋㅋ. 영어 못해서 기죽을 아들은 아니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걱정이네. 너무 얇게 입지 말고 잘 조절해서 감기 걸리지 마.
참, 아빠가 네가 없어서 밥이 줄지 않는다고 전해달래.  

아들에게 썼던 10년 전 편지를 읽다 보니 그날의 풍경이 생생했다. 소중했던 시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혼자서 즐기기에 아까운 추억 편지를 아들에게 보내줬다. 사랑이 넘친다는 답장이 왔다.


목차에 편지들을 다 읽고 로그아웃하려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뭐지? 작년에 딸에게 쓴 편지는 어디 갔지."

가슴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이 코끝에 닿았다. 딸이 편지 타령을 한 이유를 1년이 훨씬 지난 후에 알 수 있었다. 작년 3월, 영어마을에서 4박 5일을 보내는 동안 우리 딸은 단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받은 편지를 선생님이 읽어주는 동안 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편지 왜 안 보냈냐는 한마디 말도 없던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짜증 난다고 뭐 하는 거냐고 난리 쳤을 응석받이 막내딸을 누가 이렇게 빨리 철들게 만든 걸까? 남편이 원망스럽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나는 나대로 노력했었다. 아이들에게 소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나를 다그쳤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당연했다고 나를 위로해 본다.


막내한테 편지를 쓰라고 아들에게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오늘 열어 보니 어제 아들이 딸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자기들끼리 통하는 유머로 일관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여기 있다고 매일 편지를 쓸 것이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서 있다고 알려줄 것이다.


죽을 것 같던 산통을 겪고 삼 남매를 낳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고통이 가물거린다. 우리 아이들에게 작년 3월에 아픔도 내가 겪은 산통 같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똘망했던 내 눈 돌리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