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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Nov 12. 2021

인연

2006년 10월

어제 친구 엄마를 영원히  떠나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100세 시대에 80세도 안 된 연세에  돌아 가신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와서 자식 여섯을 낳아 키우면서 큰 딸을 먼저 하늘로 보내셨다. 그 큰 아픔을 가슴에 안고 잊은 척 살다가 먼저 간 딸에게 가셨다. 키가 170센티미터가 넘으셨던 어머니가 복숭아가 가득 들어 있는 노란 플라스틱 상자를 번쩍 들어  올리던 모습이 마치  장수 같았다. 대학 시절 친구네 과수원일을 도와주러 갔던 내가 박스는커녕 과일 몇 개를 갖고 끙끙대는 모습을 보고

 "밥을 더 먹어야겠어."

농담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의 보살핌으로 폐암을 이겨냈고 지금은 건강해지셨지만 이제 혼자 남겨진 아버지를 걱정한다. 나는  산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지금의 나처럼 산 사람은 다 산다.




오늘은 특별한 기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30년 전에 지금 근무하는 유치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재단에 땅을 보시하고 20년 가까이 후원을 해 주신 분이 돌아가신 지 15주기가 되는 날이다. 우리는 그분을 불교에서 받은 법 우법왕자를 우보살님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우보살님은  경성대학교 보육과를 나오셨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유아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다. 평생 교육과 봉사의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병문안을 갔었다.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다고 하시면서 아이들이 크고 나면 봉사 많이 하라는 유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보내드리는 날 불교 의식에 맞게 준비한 영결식에서 나는 찬불가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우보살님이 떠나고 작은 시비가 유치원 한편에 세워졌다. 돌아가셨지만 모두에게 좋은 인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같은 달 1주일 전에 떠난 아쉬운 인연이  또 있다. 그때도 나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장례식장에서 밥을 삼키지 못하고 선생님들 앞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가슴이 뜨거워서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유치원에서 처음 만난 기사님이다. 우리는 김 과장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유치원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이 있는 김 과장님은 초임인 나에게 당근과 채찍을 함께 주셨다. 차량 지도부터 말씨까지 하나하나 체크하실 때는 정말 싫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김 과장님의 조언은 내가 유치원 교사를 하는 동안 기본이 되었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습을 다 지켜보셨다. 아이를 맡길 때가 없어서 쩔쩔매는 나를 사모님까지 나서서 도와주셨다. 불우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항상 기도하셨고 노력하셨다. 콜라에 소주를 타서 드셨던 분, 몸이 아프면 병원보다 판콜에이를 드셨다.  버스 한 대로 시골 여기저기까지 아이들을 데려다주다 보면 긴 시간을 운행해야 했다. 차량 운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동네 작은 상회에 들러서  소시지와 아이스크림으로 잠을 깨워주셨다. 그런데 15년의 인연을 끊고 갑자기 떠나셨다. 나는 받기만 했지 김 과장님의 아픔을 알아채지 못했다.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우보살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어서 인지 10월에 함께 떠나셨다. 그래서 나는 매년 오늘 함께 기도를 올리고 우리의 인연을 기억한다.




그리고 또 한 명, 같은 달  두 분과 함께 떠난 가슴 아픈 인연이 있다. 유치원에서 3년을 함께한 제자였고 우리 아들의 절친이기도 했던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뻤던 아이,  아이 답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커서 우리 아들뿐만이 아니라  반 친구들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떠난 해외여행에서 해파리에 물리는 사고가 났다. 아이를 한국으로 데리고 올 수 있게 도와달라며 막무가내로 울던 엄마의 전화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한국에서 유치원을 함께 다닌 친구 엄마들과 믿기지 않는 마지막을 준비했다. 마지막 가던 날 우리 아들도 함께 했다. 사람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아이한테 어른들이 왜 절을 하냐고 물으면서 아들은 친구가 좋아하던 껌 한 통 놓아주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지에서 눈물 대신 기도를 하려고 노력했다. 예쁘고 예뻤던 내 제자가 부디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도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야 죽는다고 믿었던 아들에게 죽음에 대한 설명을 하기가 참 어렸다.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든 꼭 죽는다. 그런데 죽는 시기는 다 다르다. 네 친구처럼 아이 때도 죽을 수 있다. 나도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내 종교를 떠나 아이가 알기 쉽게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다 보고 있다가 나중에 만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아들이 질문다.

"그런데 엄마 내가 늙어서 죽으면 친구가 나를  알아보면 어떡하지?" 

아이다운 질문이었다.

"아니야, 네가 어떡해 어른이 되는지 다 보고 있을 테니까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짧은 시간 가장 큰 행복을 주고 간 보살 같은 딸이라고 표현했던 그 엄마의 말이 생각난다. 내 마지막 기도처럼 어딘가에서 새로운 보살로 행복하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30년 동안 유치원 안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 중에 2006년 10월에  함께 떠나보내야 했던  세 명의 인연은 나에게 삶과 죽음의 각자 다른 모습을 보게 하였다. 오늘의 내 삶이 꼭 내일의 내  삶으로 이 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진리를 인정해야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약속하고 살고 있다. 그 진리를 잊고 오늘의 내 행복한 삶을 챙기지 못하고 살다가  매년 오늘 나는 세 인연의 추모식  앞에 다시 정신을 차리곤 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지금 너의 삶의 모습이 당장 내일 죽음을 맞이해도 괜찮을 만큼 잘 살고 있니?"

"지금 너의 삶의 모습이 당장 내일 죽음을 맞이해도 괜찮을 만큼 잘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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