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처음 오던 날 이곳이 나의 제2의 고향이 될 줄은 몰랐다. 오늘은 자동차 검사를 맡긴 김에 읍내를 걸어서 다녀와야 했다. 오고 가고 40분이면 충분한 거리라서 짐이 없다면 걸어서 다녀오기에 좋은 거리다. 하지만 유치원 근무 상황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기에 항상 차를 이용했지 여유롭게 걸어 본 것이 오랜만이다.
걸어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유로워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엇이 생기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기억을 더듬게 된다. 30년 전에 이 길은 사람 둘이서 손을 잡고 걸으면 좋을 정도의좁은골목길이었다. 이제는 이차선 도로로 변해 있다. 산 아래 빌라 앞에 기울어가던 옛 기와집은 공사가 한 창이다. 얼핏 지나가다가 기둥만 남기고 철거하는 모습을 봤는데 벌써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고 새로운 한옥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 집에 부동산 간판이 걸려있다.
잠깐 걸어 올라오니 길 옆에 30년 전부터 있던 계란 파는 집은 아직도 변함없이 계란을 팔고 있다. 계란 파는 집을 지나면서 살짝 언덕길이 된다. 언덕길을 시작으로 주택 앞 담장에 그림이 시작된다. 마을 정비 사업으로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작은 조형물을 이용해서아기자기하고 깔끔한 마을 길을 만들어 놓았다.코스모스 그림이 정이 간다.
그림이 끝나는 지점에는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긴 감이 담장 바깥으로 보인다. 그 옆에 최근에 지은 원룸이 보인다. 그 장소가 무엇이 있었는지 잠깐 기억을 더듬는다. 음~ 밭과 야산이었던 거 같다.
이발소 표시 등이 돌아가는 모퉁이를 돌아가면 오른쪽에 고물상이 있다. 고물상 바로 전에 무와 배추가 있던 밭은 주차창으로 변해 있다. 약간 위쪽으로 새로 지은 하얀색 집의 마당 겸 주차장 같다. 주택인지 다른 용도의 집인지 잘 모르겠다. 그 집 바로 앞을 고물상이 반쯤 가리고 있어서 새로운 집의 변화가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물상은 바로 길 옆에 있어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주로 쇠로 만든 고물들을 산처럼 쌓아놨다.
주인 할머니가 가게 앞에서 고물들을 분리하고 계신다. 고물상의 모습이 예쁜 마을길과 생경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하게 보니 나름 괜찮다.
봄이면 살구가 주렁주렁 열린 벽돌집을 지나고 마을 어른들을 위한 운동기구를 지나면 언덕 위에 있는 빌라 입구가 보인다. 1998년에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빌라다. 빌라 입구에 있던 커다란 개장과 돼지 사육장은 없어지고 거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집이다. 여름에 얼핏 지나가다 붉은 장미 넝쿨이 대문을 장식해 주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들장미 소녀 캔디에서 앤서니 집을 연상하게 했었다. 지금은 국화가 심어져 있다. '어떤 부자가 살까?'이 집을 한 번 흘깃 들여다보면서 지나쳤다. 세 갈래 길이 생긴다. 나는 직진을 해서 새로운 도로로 갈 것인지 우측 길을 따라 산책길로 갈 것인지 고민을 했다. 나는 옛길을 찾아서 우측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길은 나름 사연이 많은 길이다. 큰 아이를 키우면서 아는 집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유치원 학부모가 다였던 나는 주말마다 아이와 이 길은 몇 바퀴를 돌고 돌았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는 이길로 출근을 했고 남편과산책을 했다. 태어나서는 포대기에 업고 걸으면서 풍경에 대해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사를 하고 나서는 한 동안 이 길을 잊고 살았다.
배꽃으로 가득했던 과수원은 예쁜 단독주택이 여러 채 들어왔고 원룸이 들어서 있다. 배추와 무밭을 지나서 늘 아이와 들렀던 정원이 예뻤던 첫 번째 제자네 집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동네에서 가장 멋진 집이었는데 이제는 원룸에 가린 낡은 집이 되어있다. 호두나무, 단풍나무, 국화꽃이 가득했던 정원은 영산홍 나무가 웃자라고 국화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대문 가까이 가서 자세하게 드려다 본다. 아쉬움에 손을 번쩍 들어 정원의 가을을 찍어본다. 아이와 갈 곳 없던 나는 산책 끝에 언제나 이 정원에 들어가서 놀다가 할머니가 주시던 간식을 먹고 한 참을 수다를 떨던 곳이다. 배꽃 사이에서 일을 하시다가 웃음 가득 반기시며 간식을 내주시던 할머님은 지금 병환으로 요양병원에 계시다. 난 항상 젊었던 그 시절의 할머니를 기억하는데 이제 더 이상 이 정원에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속상하고 그립다.
제자 집 앞에서 그렇게 잠깐을 기웃거리며 옛날을 추억하다가 모퉁이를 돌아서 내려왔다. 개들은 여전히 왈왈 낯설다고 짖어댄다. 오른쪽에 감나무에 감이 남아있다. 아래를 보니 떨어진 감이 있다. 주워 먹으려고 보니 먹기에는 너무 터져있다. 주워 먹기를 포기하고 감을 쪼아 먹는 까치 사진만 찍었다.
억새를 꺾어 흔들면서 길을 내려와 유치원 돌담에 도착했다.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났다. 길을 건너 편의 점에서 커피를 한 잔 샀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돌담 사이에 쪽문을 열고 유치원 놀이터 벤치에앉아서 커피를 마셨다.아이들 소리와 선생님들 소리가 뒤섞여서 들리다가 한 사람 소리만 들리기도 한다. 합창하다가 소프라노 파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한 편 벤치 뒤에서는 봄에 부화해서 병아리부터 키운 닭들이 내 뒤에서 "꼬끼오, 꼬꼬꼬"거리면서 화음을 더한다. 먹을 것을 주는 줄 알고 달려와 내가 움직 일 때마다 따라온다.모아 놓은 배춧잎을 한 덩어리 던져 준다. 바로 배춧잎을 찾아서 쪼르르 달려간다.
오랜만에 내가 돌아본 동네는 변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겠지. 동네 모습이 변하고 예전 그 사람들이 변했어도 내가 알 던 그 동네가 맞고 나는 그 사람들과 아직 여기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