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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는 흔한 말로 시작한다.

by 앞니맘

아이들과 세대 차이를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생일 날짜다. 나는 생일만큼은 음력을 사용하던 세대였다. 그래서 아이들의 생일도 내 방식대로 음력에 미역국도 끓이고 생일 기도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면서 양력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헷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모두 주민등록번호에 있는 양력 생일에 치킨과 피자를 준비하고 케이크의 촛불을 끄기로 합의했다. 그래도 나는 우리 엄마처럼 음력 생일에 미역국을 끓인다. 아이들은 생일인지도 모르고 1주일에 한 번 일상의 미역국으로 생각하고 먹는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이 정성을 담고 마음을 모아 미역국을 끓인다. 엄마가 되던 날 아이를 가슴에 안고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미역과 고기를 볶는다.


오늘은 큰 아들의 생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만 기억하는 음력 생일이다. 첫 아이의 음력 생일과 나의 할머니의 제사 날이 같은 날이다. 그래서 나를 누구보다 이뻐하시고 사랑을 주셨던 할머니를 매년 기억하고 떠올린다.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꼭 한 번은 기억할 수 있는 건 우리 아들 덕분이다.


매년 큰 아들의 생일날이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교사였지만 엄마는 처음이라 부족했던 나를 반성하게 된다. 아들에게는 초보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너무나 사랑하고 기다렸던 아들이었는데 일이 먼저였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우리는 함께 힘들었다.


나는 육아 휴직이 보장되지 않던 시절에 출산을 했다. 니, 내 직장이 그런 복지 혜택이 없는 곳이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큰 아들이 태어나는 날도 유치원에서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양수가 터져서 병원을 갔다. 그 후로도 퇴근 후에 양수가 터져서 병원으로 달려가기를 두 번 더 반복했다. 출산 후 20일도 되기 전에 출근을 해야 했다. 젖이 불어서 패드에 묻어나면 '아기가 젖 먹을 시간이 되었구나' 생각하면서 화장실에서 젖을 짜면서 울었 던 기억이 난다. 바로 코 앞이 집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달려가서 먹이고 왔을 텐데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틀렸다. 이 대목에서 나의 고지식함이 최고봉이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아들에게 젖먹일 생각에 일이 끝나자 뛰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현관문을 열고 당황했다. 시동생은 윗도리를 벗고 아들을 안고 있었고 남편은 분유를 시동생 가슴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들은 시동생 가슴을 빨다가 젖이 안 나오니까 울다가 지쳐서 목이 다 쉬어 있었다.

"뭐해요?"

"하루 종일 분유를 안 먹고 울어서 먹여보려고 하는데 안 먹어."

아들을 끓어 안고 젖을 물리니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던 모습을 보면서 눈물만 뚝뚝 흘렸던 기억과 웃통을 벗고 가슴 소독까지 하면서 조카와 아들에게 분유 한 방울이라도 먹이려고 했던 행동은 웃픈 이야기로 회자되곤 한다.


다음 날 소아과에 갔다.

"그동안은 분유도 잘 먹고 젖도 먹었는데 며칠 전부터 분유를 절대 안 먹어요."

"요 녀석이 100일이 다가오면서 젖 맛을 알았네요."

"예?"

"보통은 쑥쑥 잘 나오는 분유를 선호하는데

요 녀석은 엄마젖을 더 좋아해서 분유병을 빨지 않는 거예요."

"젖을 짜서 줘도 소용이 없어요."

"분유병에서 나오는 것은 엄마젖이 아닌 걸 아니까요. 젖을 더 일찍 떼어야 했어요."

"방법은 없나요?"

"굶기면 빨 수밖에 없어요."

참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나에겐 참 어려운 방법이었다. 출근을 하면 엄마 젖만 기다리며 하루 종일 굶어야 하는 아들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날 울어도 젖을 물리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 젖 말리는 약을 먹었다. 결국 아들은 배가 고파서 꼬박 12시간을 넘게 울다가 지쳐서 젖병을 빨았다. 그날도 아들과 같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동학대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초보 엄마가 아들에게 준 첫 번 째 시련이고 상처였을 것이다.


낮과 밤이 바뀐 아이를 끓어 안고 꼬박 밤을 새우고 출근하면서 울었던 일도 기억이 나고 출근하는 내 목을 붙잡고 눈물 콧물 흘리며 매달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서 엄마 노릇이 제일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래도 1년은 아들을 위해서 일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하지만 나는 내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억지로 나를 위로한다.


물티슈가 몸에 안 좋다고 해서 가재 수건에 물을 묻혀 가지고 다니면서 씻어 주었고 이유식은 꼭 좋은 재료로 만들어 먹였다. 요플레, 치킨, 햄버거, 주스 간식은 물론 간장, 된장, 고추장 등 다 집에서 만들어 먹이면서 키웠다. 기억을 못 해서인지 라면, 콜라를 매우 즐기는 아들을 보면서 다 소용없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나는 갑작스러운 유아 상담으로 아들과의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해서 추운 겨울 길가에서 2시간을 기다리게 했던 엄마다.

나는 내 출근 시간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태권도 학원차 타기 싫다고 하는 아들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혼부터 내면서 화를 냈던 엄마다.

나는 유치원 아이들의 눈곱만 한 상처도 알아차리고 약을 발라주면서 아들이 원형탈모가 온 것도 몰랐던 엄마다.

나는 유치원 아이들의 작은 행동에도 칭찬을 하지만 내 아들의 작은 실수에는 단죄를 한 마귀 같던 엄마다.


엄마는 이렇게 유치원에서 살아남았다.


아들아, 네 일기장에 마귀 같다고 썼던 엄마는 다 잊어주고
좋은 기억만 갖고 커줘서 너무 고맙다.
엄마 역시 엄마도 처음이고, 직장맘도 처음이라 너무 힘들었어.
이제 엄마의 이야기를 가장 경청해주는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 생일상에 엄지 척으로으로 답하는 센스쟁이 아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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