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998년 겨울에 결혼식을 올렸다. 동성동본 혼인 금지 법이 한시적으로 풀렸을 틈을 타서 결혼했다. 응답하라 1988에 덕선이 언니 보라와 같은 상황이고 같은 시기다. 올 해로 23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했다. 그동안 변한 건 아이들이 태어나서 둘에서 다섯 식구로 늘어났고 빌라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20대에서 50대가 되었다. 하지만 23년째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나만 기억하는 기념일이다.
결혼 전에 남편은 본인도 그렇고 가족들도 기념일 같은 거 챙기는 거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연애를 할 때도 남편은 생일 같은 것을 잘 챙기지 않았었다. 선물이라고 받은 것이 의정부 시장에서 팔던 돼지인형 딱 하나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옷도 사주고 때마다 사탕도 보내고 편지도 쓰고 했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난다. 사실 나도 기념일에 수선스러운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평소에 잘 하자는 주의였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의 말과는 달랐다. 시댁 어른들의 기념일은 꼭 챙겨야 하는 분위기였다. 결혼 첫해부터 시할머니 생신, 시아버지, 시어머니 생신 모두 친인척들을 초대해서 내가 생일상을 차렸다. '이런 분위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상하다?'라고 생각했다.
"생전 안 하던 생일잔치를 왜 자꾸 하려고 하세요?"라는 눈치 없는 남편의 말을 듣고 내가 며느리로 들어오는 순간 가풍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첫 아이가 생기고 식당에 가서 먹은 적도 있는데 어차피 나는 아이를 보느라 좋아하는 한우를 한 점도 못 먹고 온 적도 있다. 계산은 내가 했다. 유난히 그때가 생각나는 건 좋아하는 한우를 못 먹고 계산만 한 억울함도 있겠지만 아기를 업고 고깃집 정원을 빙글빙글 돌면서 언제 아기를 받아줄까? 기다리면서 서글펐던 그날에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날 나는 내 친정 부모님께는 한 번도 내 손으로 만든 생일상도 내 돈으로 준비한 한우를 대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에 대해 남편에게 물으면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이상하다. 나는 또렷한데... 그 이후로 다시 집에서 차리기 시작했다. 나가서 먹어도 편하지도 않고 돈은 돈대로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엄마에게 내 손으로 생일상을 차려드리지 못했다.
친정 엄마는 할머니 생신에 매 년 아침 생일상을 차렸다. 생신 날 아침에 동네분들에게 식사를 하시라고 내가 뛰어다니면서 연락병을 담당했다. 그리고 우리 생일에는 미역국을 꼭 끓여 주셨다. 자취를 하던 시절에도 하루 전날 밤에 오셔서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셔서 생일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
"엄마 바쁜데 힘들게 뭐하러 왔어? 미역국 안 먹으면 어때서..."
"생일에 미역국을 먹어야 인복이 있다고 했어."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미신이야."
"나중에 엄마가 못 끓여주더라도 꼭 해서 먹어."
엄마의 미역국 덕분인지 살면서 힘들 때마다 나를 도와주고 포기하지 않게 함께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는 일이 엄마가 해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선물에 인복이 생긴다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줌으로써 나는 그 믿음으로 힘든 날을 이겨냈는지도 모른다. 나도 생일날 아침에 가족에게 미역국을 꼭 끓여준다. 나는 내가 엄마가 되었던 그날의 마음을 잊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미역국을 선물한다. 그리고 저녁에 케이크에 촛불을 끄고 피자나 치킨으로 파티를 하는 정도로 마무리를 한다. 막내가 생기면서 선물을 해야 하는 것이 추가되기는 했다. 막내가 그림, 편지, 때론 용돈 1,000원이라도 모두에게 선물을 하면서 가풍이 바뀌고 있다. 예쁘다. 좋다.
딸 때문인지 전과는 달리 기념일이 되면 남편에게 섭섭해지는 것이 많아진다. 나이 때문인지 주기만 하는 내가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인지 잘 모르겠다.
"자기, 생일인데 선물은 없어?"
"돈은 자기가 다 갖고 있으면서 무슨 돈이 있어서 선물을 해? 평소에 잘해야지."
"그 말도 맞네. 그럼 들꽃이라도 꺾어와. 하하하하" 하면서 웃어넘겼던 지난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니 두 번 인가 누구의 코치였는지 생일날 미역국을 끓여 준 적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음식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레시피를 배워서 끓여 준 미역국이 정성과 더해져서 실제 맛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그다음 해 미역국은 날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퇴근 전에 허겁지겁 끓여 놓으면서 주방을 어질러 놓기만 한 맛없는 미역국이었다. 애들은 아무도 먹지 않아서 내가 다 먹어야 하는 미역국을 더 이상 끓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미역국 이벤트는 끝이 났다. 그냥 계속 미역국을 끓이게 하고 내가 더 큰 리엑션을 했어야 했다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요."라는 광고 카피처럼 내가 지혜롭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의 말처럼 일부러 맛없게 끓인 걸까? 둘 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내 지혜나 계산 없이도 먹을 수 있었던 미역국, 나만을 생각하고 사랑을 가득 담은 엄마의 미역국과 같은 생일 미역국을 남편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주 큰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생일보다 더 애매한 날이 결혼기념일이다. 생일하고 달라서 내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간다. 카카오가 알림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잘 못 된 결혼인지 기념일마다 뭔 일들이 생겨서 혼자서 지낸 적도 많았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최악의 결혼기념일이 있다. 남편이 때 마침 시동생의 부름을 받고 시동생 집에 가서 며칠째 오지를 않았다. 동서도 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기다리다가 전화를 했다.
"언제 와?"
"왜?"
"오늘이 결혼기념일인데...."
"그게 뭐가 중요해. 동생이 아파서 오늘 못가. 끊어."
마누라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동생은 그럴 수 없어서 더 중요하다는 막말로 마무리한 결혼기념일이었다. 내가 그때 미쳤었다. 그때 남편을 엄청 사랑했나 보다. 그날 바로 시동생에게 남편을 아주 보냈어야 하지는 않았을까? 남편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양보했으면 큰 복을 받았을 텐데... 내 가슴에 대 못을 박는 막말까지 하면서 멀쩡하게 있는 동서를 제치고 자신의 곁을 지켜준 형의 사랑을 시동생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로 결혼기념일은 "이혼은 안 하고 또 1년이 지났네. 앞으로도 1년 잘 살아 봅시다." 하는 가벼운 맥주 건배사로 기념하고 보내는 것이 딱 적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도 잊고 지나는 해도 많았다. 나는 잊은 적이 없었지만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만 기억하는 결혼기념일과 생일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마음과 겹쳐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올해 역시 남편은 내 생일에는 지인들과 별장에 놀러 갔고 나는 아이들과 파티를 했고 결혼기념일은 바빠서 잊었다고 했지만 귀찮아서 모른 척한 것 같다. 이렇게 보내면서 내가 변하고 싶어졌다. 남편은 가풍에 따라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귀찮아하고 선물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알고 지냈다. 그래서 생일이나 기념일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내가 부모님과 가족 모두를 다 챙겼다. 그런데 남편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물도 하고 쿠폰도 날려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남편을 이해하고 배려한다고 했던 행동들이 내 진심도 아니었고 제대로 된 배려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평소에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도 아니고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작은 관심과 마음을 받아 보지 못하고 23년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다. 안방에 굴러다니는 돼지새끼 인형을 당장 때려잡아서 생일 상에 올리고 싶었다.
적어도 나나 우리가 축하받아야 하는 날에는 내손으로 차린 음식보다 색다른 외식도 하고 싶었고 작아도 마음이 전해지는 선물이라도 받고 싶었다. 1년에 한두 번 내가 주인공 같은 날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내 진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다 지친 것이다. 아니 화가 난 것이다. 어머님이 며느리를 얻고 처음으로 본인이 주인공이 되는 생일파티를 하고 싶어 했던 심정을 이해하는 시점 이기도 했다.
나는 올해도 내 손으로 대충 만든 연어 초밥을 만들고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코로나가 이유였다. 연어초밥을 앞에 놓고 가족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