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어가는 작은 이야기들

by 앞니맘


11월은 일에 치여 주말도 없이 보냈다. 몸에서 신호가 왔고, 마음에도 정리가 필요했다.


그즈음 상대측 상고 이유서가 도착했다. 여러 의견을 듣고 숙고한 끝에 답변서를 제출했다. 판결은 결국 한 해를 보내고 다음 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오래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쩐지 쓸쓸한 일이다.


지난주에는 마지막까지 남편과 나를 도와주었던 작가님이 집을 찾았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내가 만화가로 나설 수는 없지만, 이우영이 남기고 간 사회적 과제를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남편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마늘과 텃밭의 배추를 건넸다. 배추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남편과 이어준 기억이 또 하나, 내 일상 속에 덧붙여졌다.


오늘은 광명 전시회의 연출가들이 전시물을 반납하러 왔다.
정성스럽게 작품을 챙겨 가고 가져오는 그들의 손길과 마주할 때마다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그동안 보관하지 못하고 버려진 원화와 남편이 닮아 있어서다.


마지막까지 손으로 밑그림을 그렸던 그의 작품은 이면지에 남아 있다. 그도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귀한지 끝내 몰랐던 것 같다.

우리는 예전처럼 식탁에 둘러앉았다. 달라진 건 간식뿐이었다.
내가 농사지은 서리태 두유, 과일, 떡, 그리고 갓 구운 군고구마. 고구마가 들어오는 순간 울려 퍼진 환호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전시회 평가와 다음 전시를 논의하는 시간은 이제 자연스럽게 나와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남겨진 자들의 몫처럼,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사모님, 전시장에서 챙겨 온 편지예요.”

유치원 제자가 전시회를 다녀간 뒤 남긴 편지였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쁜데, 글씨까지 잘 썼네.”
가족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가까웠지만, 좀처럼 표현하지 않던 아이였다.

'아빠처럼 따뜻하고 다정했던 남편을 기억하며, 막내딸에게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주는 언니가 되고 싶다.'라는 제자의 이 말은 남편이 짊어지고 간 짐을 조금 덜어주는 듯한, 고맙고도 소중한 마음이었다.


내가 모르는 곳곳에 남편과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여럿 있을지도 모른다.

그 추억들이 모두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이길 바란다. 이제 그는 이야기만 남기고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남편을 추억으로 간직한 사람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어 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편안하게 놓아주는 삶을 향해 걸으며

그렇게 우리의 또 다른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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