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준 시간.
야심 차게 백수가 된 이유를 선포한 지 어느덧 몇 개월이 흘렀다. 실제 백수가 된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이었다.
백수로서 꽤 오랜 기간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달콤하고, 생각보다 불안했다.
일주일에 두 번, 세 번이라도 글을 올리겠노라 다짐했지만, 이리저리 떠도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정리해야 할지, 내가 느끼는 것들을 날 것 그대로 써 내려간 것을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 줄지 두렵기도 했다. 물론 '써야 한다'는 굴레가 목에 걸린 순간, 언제나 그랬듯 도피를 택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냥 쓰면 안 되고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도 글쓰기를 미루는데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성을 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온 지금, 백수였던 올해의 시간이 내게 남긴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는 올 한 해 커다랗다면 커다란 것부터 사소한 것들까지, 생소한 것들에 도전 아닌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라면 주야장천 직무에 관련된 것만 하던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편집디자인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분야에 도전했다.
그 외에도 대형 웹소설 플랫폼에 내 소설 연재해 보기, 브런치스토리에 글 써보기,
자주 읽지 않던 순수 문학작품 읽기, 유명하지 않은 영화감상하기, 대형 플랫폼이 아닌 곳에서 연재되는 소설 읽어보기, 단편 소설 쓰기, 시 쓰기, 게임 안 하기, 숏츠 안 보기, 애니메이션 영화 보러 혼자 영화관 가기 등등
정말 별것 아닌 것들을 하면서 나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 초, 퇴사했을 무렵엔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장바구니에 담은 책이 쌓여가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온종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의심했다.
내가 정말로 그것들을 원하는 건가?
아니면 회사에서 도망치려 뭐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인 건가?
문학적 소양이 빵점인데 내가 소설이나 에세이를 쓸 자격이 있을까?
마음껏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경험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백수의 시간은 나에게 최소한의 확신을 주었다.
나는 글자를 읽으면 안정감을 느낀다.
생각보다 문학작품에 크게 감명받는 사람이며,
자극적인 것보다 차분하고 잔잔한 콘텐츠를 편하게 받아들인다.(물론 자극적인 건 항상 재밌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오는 주기가 의외로 짧다.
결론은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곁에 두고, 누구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글을 쓴다.
매일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면 좋을까 무의식이 상상한다.
이것들을 짧게라도 하고 나면 마음 편안하게, 흐뭇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거기서 작은 행복감을 느낀다.
물건을 사거나, 게임을 하거나, 내일 공개되는 재밌는 드라마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즐겁다.
이제 나는 다시 회사원으로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나의 도전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의 성과에 욕심내기보다는 천천히, 즐거운 마음으로 노력하고 성장해 나가고 싶다.
이제는 상황의 어려움에 두려워하며 불평불만하지 않으려 한다.
바쁜 현실 속에서도 나만 아는 낭만을 잃지 않고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 볼 생각이다.
중요한 건 내면의 상태라는 걸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까.
오히려 그것들이 나의 좋은 글감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니까.
언젠가 다시 백수가 될 날이 올 지 모른다.
그때는 더 성장한 백수가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