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고 나서, 왜 하필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돌아보면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던 이야기와 글.

by 윤숲






만약 누군가 내 삶에서 '이야기'란 존재를 쏙 빼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나는 흐물흐물 늘어진 겉껍질만 남아, 제대로 설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유치원 때는 전래동화책을 끼고 살았는데, 나는 특히 심청이를 좋아했다.

심봉사를 보면 우리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집에 있던 전래동화 세트에 담긴 삽화의 작화가 정말 일품이었다.

정말 연꽃 같이 보드랍고 어여쁘게 그려진 심청이 얼굴이 아직도 생각날 정도다.


초등학교 때 나는 겁이 아주 많아서 자주 잠을 설쳤다.

그럴 때면 나는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홀로 위인전을 펼쳤다.

오직 나와 위인전 속 인물만이 마주한 고요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귀신도 두렵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비디오가게에 드나들었다.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고르고, 비디오가 담긴 비닐봉지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 위에선 항상 설렘으로 발걸음이 춤을 췄다.

나는 비디오가게 아주머니랑 친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주머니가 남몰래 내게 19세 관람불가 비디오를 빌려줬을 정도다.

아주머니가 우리끼리 비밀이라면서, 엄마한테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말투가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고 정겹다.

아, 물론 그때 빌렸던 영화들은 음란물이 아니라 그분이 생각하기에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이었다.

예를 들면 타이타닉 같은 작품이었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초등학생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리 없는데도,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 내 가슴속에 꽉 틀어박혔고 숨통이 조일만큼 마음이 아렸다.

그 여운에서 며칠 동안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걸 보면 감수성이 참 풍부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그 명작을 1년에 한 번 이상 꼭 챙겨본다.)


그만큼 나는 여태껏 한시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에 둘러싸여 살았다.

애니메이션은 물론 만화책, 영화, 소설, 드라마 심지어 컴퓨터 게임을 할 때도 캐릭터에 숨겨진 이야기를 꼭꼭 찾아 읽었다.

생각해 보면 백수가 되고 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지?'라고 내게 물었을 때 '이야기'가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이야기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잘 만든 이야기는 내 마음속에서 휘청이다가 다시 끌어 오르고, 마구 난도질하다가 턱밑을 콱 막는다.

가끔 너무 커다란 감정의 파고에 휩쓸려 괴로울 만큼, 나는 쉽게 이야기에 압도된다.

내게 그것보다 짜릿한 건 없다.



어른이 되고 빡빡한 삶을 살면서, 중요한 뭔가를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의 이야기 사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언젠가 글을 썼던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재밌는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단짝친구와 나는 작은 카페하나를 만들었다.

그 카페 멤버는 같은 반 친구 5명 정도였던 것 같다.

우리는 그때 한참 귀여니 작가를 필두로 유행하기 시작한 '인터넷 소설'이라는 걸 거기에 직접 써 올리면서 놀았다.

방과 후에 글을 쓰면 멤버들이 읽어준다. 그리고 다음날 서로의 글을 가지고 수다를 떨었다.

내 글에 재밌다는 댓글이 달리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매사에 소심했던 내게 무슨 용기가 솟은 건지, 나는 거기서 느낀 기쁨을 발판으로 규모가 꽤 큰 인터넷 소설 카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못 봐줄 정도로 서툰 글솜씨였지만 의외로 내 글은 꽤 인기 있었다.

한 질의 소설을 완결했을 땐, 꽤 유명한 소설 카페에서 작가 초청까지 받았다.

내가 글을 잘 써서는 절대 아니었고, 당시 내 소설이 엄청나게 뜬 것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쓰는 사람에 비해 읽는 사람이 많았고, 소비층이 주로 내 또래였기 때문에 '반응이 없지는 않았다' 정도다.

하지만 그 사건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용기라는 걸 심어줬던 일임은 분명하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 봤더니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내가 쓴 글을 올려놓은 카페가 있었다.

다시 읽으려 클릭해 들어가 봤다. 역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유치 끝판왕이다.

하지만 그 밑에 달린 댓글들에서 어린 시절의 그 설렘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힝... 이거 보고 한참 울었어여ㅜ_ㅜ

-주인공 어떠켕...작가님 그냥 살려주세여-_-


앞뒤도 안 맞고 어설픈 이 소설을 읽어준 감사한 사람들에게서 그때의 내가 선물 받았던 설렘과 감동.

그건 내 안에 이름모를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중학교 때까지 열심히 끄적이던 글들, 그리고 내가 사랑한 이야기들은 엄한 집안환경과 지겨운 학교생활에 억눌린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다 문득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참, 내가 대학원서를 낼 때 부모님께 가고싶다고 했던 과가 문예창작학과였지.

하지만 그건 밥먹고 살기 힘들다며 좌절당했다.

최근 내가 가장 재밌어했던 작품이 뭐였지?

음, 그건 웹소설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소년만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소위 먼치킨이라고 불리는 장르들은 가볍게 읽기 좋으면서도 무력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나를 자유롭게 해 줬다.

사실 웹소설을 읽거나 애니메이션을 볼때면, 나는 혼자 이런저런 세계관을 꽤 세밀하게 상상하곤 했었다.

나도 재밌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희열을 전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었다.

그런 욕망이 솟아오를 때마다 '에이, 내가 무슨 소설을 쓰겠어.' 하며 단념해버렸다.


그러나 이 모든 걸 회상하던 그 순간.

애써 무시했던 꿈들이, 말릴 틈도 없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 오징어처럼 가만히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하얀 여백 위, 타자기에 손가락을 얹은 순간, 습관적으로 나는 멈칫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난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재능도 없는데.'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우고 내가 백수가 된 이유를 되새겼다.

'그냥 해보자.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날부터 나는 한 달간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 오로지 글쓰기에 몰입했다.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

멋모를 때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샘솟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

심심할 땐 친구였고, 무서울 땐 보호자였던.

억눌린 나를 표출할 수 있게 해 준 숨구멍.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결국 나의 순간순간을 지탱한 것이 언제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폭풍 치는 치열한 바다 위로 막 엮은 뗏목을 띄운, 어설픈 선장일 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keyword
이전 02화퇴사는 나를 책임지기 위한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