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했던 나의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 소설
평소에 나는 '나무'라는 존재를 매력적으로 느꼈다.
나무는 언제나 처음 싹을 틔운 그 자리에 서서
좋아하는 것을 쫓을 수도, 보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할 수도 없다.
자신의 위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저 감내하며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무에게서 느껴지는 푸르른 여유가 좋았다.
그것은 네 번의 계절과 노래하는 새들, 산들바람처럼 매번 혹은 가끔 찾아오는,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우리들은 지나칠 수밖에 없는 사소한 것들까지 반갑게 들여다볼 수 있는 너른 마음처럼 느껴졌다.
굵직하고 거칠거칠한 줄기와 풍성하게 뻗은 가지 끝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볼 때면 이 나무는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어떤 것들을 보며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솟아 신비롭기도 하다.
600년이란 시간 동안 줄곧 그 자리에 서 있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소설 속에서 팽나무는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과 얽힌 여러 인연의 탄생과 죽음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 지켜본다.
팽나무 할매가 그들을 아꼈는지,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설 속 모든 삶과 죽음들 사이에 존재하는 주인공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무'이기에 더 마음이 먹먹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가끔 나무가 개입하는 비현실성이었다.
그것이 잠깐 사이 정든 것들을 떠나보내는 내 섭섭한 마음을 조금은 해소시켜 주었다.
나무의 탄생부터 현대까지.
흐르는 시간을 따라가며 읽다 보니 나라는 존재가 거스를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의 장엄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들의 소중함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도 소설 곳곳에는 한 생명의 치열하고 아름답고 슬픈 여정들이 잔잔하게 담겨있었다.
존재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참 마음 아프고 그리운 일이다.
한 그루의 나무에, 드넓은 갯벌에, 그리고 모든 생명에는 그들만의 시간과 기억들이 담겨있다.
새만금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자연이 피고 지며 만든 수많은 생명들의 터전을 감히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 이렇게 쉽게 망가뜨려도 되는 걸까?
그건 사실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편리함 속에 나는 살고 있으니까.
이 소설은 그런 나에게 이런 당연함이 올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새는 살기 위해 팽나무 열매를 따먹었다.
그러나 곧 천적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
땅 위에 엎드린 작은 새의 사체는 자신의 위장 속 팽나무 씨앗의 양분이 된다.
수도승은 나이가 들어 병들자, 평생 자신을 먹여 살렸던 갯벌에 스스로 몸을 내어주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그동안 먹은 것들이 나의 피와 살이 되었고, 나도 어느 날엔가 어떤 누군가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조금 겁이 났다.
내가 편하게 사용하는 모든 것,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였다.
그것들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루고 어렵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편리함 보다, 경제적인 이득이나 효율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선조들은 자연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남겼고 자연을 이용하기를 최소한으로 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삶의 의미 중 다른 것들을 치워놓고 경제적인 목적에 많이 치우쳤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나 또한 '나 한 사람 조심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편하고, 쉽고, 빠른 쪽을 택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나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커다란 변화는 주지 못할지라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아주 커다란 의미가 될 것만 같다.
단지 소설 한 편 읽은 것뿐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연과 삶의 소중함, 그리고 안타까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내일부터는 불편하지만 의미 있는 나날들을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