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지박령, 빈 집에 갇혔네...
<고스트 스토리>
기업명 : A24 Films LLC
설립 : 2012년 8월 20일
독자적인 매력으로 독립 영화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영화 배급사 'A24'. 홍대충, 예술충이라면 단연코 좋아할 영화 대부분이 이곳을 통해 나온다. 심지어 로고도 간지 난다. 영화 오프닝 화면을 가득 채우는 A24 글씨를 보는 순간, 예술충 심장에 A24 오버로크.
무슨 영화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음... 저는 A24 영화요."라고 해봐라. 간지가 철철 흐르다 못해 온몸에 예술충 아우라가 흐른다. 나만 알고 싶은 곳이었는데, 너무 유명해져서 슬픈 영화 배급사.
내가 본 A24 작품
더 위치, 더 랍스터, 이퀄스, 고스트 스토리, 굿 타임, 플로리다 프로젝트, 킬링 디어, 레이디 버드, 유전, 핫 썸머 나이츠, 미드소마, 더 라이트 하우스, 언컷 젬스, 세인트 모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성난 사람들, 더 웨일 (스릴러 요소가 가미된 걸 주로 봤다)
고스트 스토리(A Ghost Story, 2017)
장르: 판타지, 로맨스
감독/ 각본 : 데이빗 로워리
출연: 케이시 애플렉, 루니마라 외
음악: 다니엘 하트
배급사 : A24
한국 배급사 : 리틀빅픽처스, 더쿱
상영시간 92분
제작비 : 10만 달러
상영등급 : 12세 관람가
(내용 출처-나무위키)
줄거리
사랑을 잃다.
교외의 작고 낡은 집 -
작곡가인 C와 그의 연인 M은 조용하지만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C는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M은 무거운 슬픔에 잠긴다.
사랑을 기억하다.
창백한 조명의 병원 영안실 -
고스트가 되어 깨어난 C는 마치 홀린 듯 M이 기다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무는 그녀와 고스트는 사랑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무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뎌낸다.
사랑을 잊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집 -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헤어지며 상실의 시간을 지나온 M은 결국 집을 떠난다.
남겨진 고스트는 영원히 그녀를 기다릴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
핀터레스트레서 외국 밈을 자주 찾아본다. 특히 어딘가 비틀린 광기 어린 이미지를 좋아하는데, 그러다 보면 꼭 눈에 띄는 게 있다. 흰색 천에 눈만 뚫어놓고 유령인척하는 사진들. 이게 뭐 어디 원작이 있는 건가? 아님 미국인들한테는 이게 유령 코스프레의 국룰인가?
근데, 이 영화에도 이렇게 천을 뒤집어쓴 조악한 유령이 나온다.
행복한 부부 사이였던 C와 M. C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둘이 함께 살던 집에는 M 혼자 남는다. M은 슬픔을 메꾸려는 듯 목구멍에 연신 파이를 밀어 넣는다. 억지로 억지로 씹고 삼키고 씹고 삼키고, 결국은 다 토해낸다.
롱테이크로 진행되어 어찌보면 지루한 씬. 하지만 M의 애처로운 먹방을 편집 없이 고스란히 느낀다는 점에서 M의 슬픔이 무겁게 전달된다.
세상을 떠난 C는 영안실에서 눈을 뜬다. 살아있을 적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모습. 본능적으로 집에 가기 위해 흰색 천을 바닥에 질질 끌며 들판을 걷는다. 어떻게 보면 대학 졸업작품에서 볼만한 연출인데, 영상 속에는 이유 모를 숭고함이 느껴진다...
C가 집에 가면 뭐 하나, M은 C를 볼 수 없는데. 덧없는 시간이 지나 M은 집을 떠났고, C 혼자만 남는다. 그 사이 집은 텅 비었다가, 이사를 온 다른 이들로 채워졌다가, 또다시 빈 집이 된다. 그 집에는 여전히 C가 있다. C는 M을 기다린다.
C의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 분명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잊어간다.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창밖을 보는 C. 옆집에도 C와 같은 유령이 있는데, 그 유령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잊은 상태. 이 둘의 대화가 슬프고 짠하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그게 누군지 잊어간다니. 동시에 두 눈만 뚫어놓은 유령들의 모습이 하찮아서 귀엽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요.
-누굴?
-기억이 안 나요...
(줌아웃...페이드아웃....)
영화는 종종 화면의 비율이 정사각형에 가깝게 바뀐다. 레이아웃이 둥글고 경계가 흐릿하다. 마치 실제 천 쪼가리를 뒤집어쓰고 눈구멍으로 밖을 보는 시야 같다.
빈 집에 홀로 방황하는 C를 보면서 기형도의 시 <빈집>이 생각났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가엾은 지박령, 빈 집에 갇혔네(고스트 스토리 ver.)
시간이 더 흘러 C의 집은 철거된다. 갈 곳을 잃은 C는 이곳저곳을 떠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긴 시간을 C는 멍하니 흘려보낸다. (천에 눈만 동그랗게 뚫려있어서, 진짜 멍하니 보내는 것 같다) 그렇게 C는 모든 것을 잃고(잊고) 사라진다.
이 영화는 연출이 다 했다. 제작비 10만 달러. 한화로 약 1억 2천. 뮤직비디오 찍는 돈으로 만든 근사한 초초초저예산 장편영화. 이쯤 되면, 유령 하찮은 건 제작비 때문이었나 싶기도...
관람 포인트 1. 초반 롱테이크 씬
단연 압권인 M의 롱테이크 먹방 장면. 먹방을 보는 나조차 슬픔에 목이 막힌다. 롱테이크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예. 앞의 롱테이크씬을 제외하더라고, 영화는 시종일관 대사도 없이 긴 장면을 느리게 보여준다. (이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포인트 2. 떠나간 사람의 이야기
유령의 시야를 설명하듯 좁아지는 앵글. 유령 같은 침묵. 한숨. 투명 인간이 되어 바라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무력함.
이 영화는 유령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미디어에서 죽음을 다룰 때면, 보통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남겨진 사람이 아닌, 떠난 사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죽은 이의 시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니까,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령에 이입해 스토리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관람 포인트 3. 꼬질꼬질한 천 쪼가리
도대체가... 고작 천 쪼가리를 쓴 유령에게서 어떻게 숭고함이며 슬픔, 한탄, 공허, 분노가 다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유령이 뒤집어 쓴 천이 꼬질꼬질해진다. (유령은 비물질적 존재인데 꼬질꼬질해진다니...) 의도한 건지 아니면 정말 제작비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으나, 꼬질꼬질함은 유령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한 시간의 흔적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해서 하찮고 또 귀여운데, 연출적으로 잘 살려놓으니 또 가슴이 웅장해짐.
관람 포인트 4. 가슴 쥐어뜯는 ost
이 영화의 ost는 음악감독 다니엘 하트가 만든 <Overwhelmed>. 전반적으로 정적이고 침묵에 가깝게 진행되는 영화 속, 거의 유일하게 나오는 브금. 심장이 뛰듯 일정한 박자의 음이 나오다가, 정적을 깨듯 한숨 같은 노래가 나온다. 영화의 톤 다운된 색감과 건조하지만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가 음악과 똑 닮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로, 이 음악만 들으면 심장을 부여잡고 싶다.
종합
☆☆☆☆(4.5)
꼬질꼬질한 천 따위에서 느껴지는 영겁의 시간. 저예산 제작비를 연출로 커버 쳤다. 시종일관 정적이라 느린 호흡을 못 보면 힘들 수도, 그렇더라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 꾹 참고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아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