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지은 Jan 02. 2024

[작업기|일러스트]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작업 분투기 #.1

작업분투기 #.1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단행본 출판



클라이언트 : 김영사

담당 업무 : 표지 및 내지 일러스트 제작

작업 기간 : 2017.09 - 2017.10


작업 배경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메일 하나가 왔다. 

‘안녕하세요, 김영사입니다.’ 


메일 내용은 출간 예정인 한 단행본의 일러스트 의뢰. 찬찬히 살펴보니, 재수생 시절 내게 큰 위로가 됐던 책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의 저자인 강세형 작가님의 신작이었다.

메일을 다 읽곤 기쁨과 설렘에 홀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난다. (이 얘기는 개인 에세이에서도 다뤘다.)


미팅은 편집자, 디자이너 두 분과 진행했다. 내 작업물을 알게 된 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단다. 당시 sns를 비롯해 약 10개의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운영했는데, 인스타그램을 통해 많은 제안이 들어왔다. 

(운영 사이트 :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 인스타그램, 폴라(플랫폼 폐쇄), 트위터, 그라폴리오(플랫폼 폐쇄), 노트폴리오, 북스 동아, 픽스필즈(유료), 산그림(유료), 비핸스, 핀터레스트)


그 당시 내가 대학생이어서 그랬던 듯, 클라이언트는 짧은 미팅에도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땐 꼭 든든한 디저트를, 집에 가서 먹으라며 양손에는 빵을 한가득 쥐여주었다. 

“학교는 재미있어요? 자취하면 밥 잘 못 챙겨 먹죠? 먹고 싶은 거 더 포장해 가요. 졸업은 언제 해요?”

지금은 이게 법카라는 걸 알지만, 그땐 감동 오브 감동…


처음 맡은 큰 프로젝트에 좋아하는 작가님. 그리고 유쾌한 클라이언트를 만난 덕분에 지금까지 했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진행과정


제작해야 할 이미지 컷 수는 총 15컷. 각 장에서 균등한 일러스트가 나와야 한다는 큰 틀은 있지만, 어떤 꼭지에서 어떤 그림을 그릴 건지는 순전히 내 자유였다. 


전체 원고를 받아 독자의 시선으로 읽으며, 어떤 내용과 문장이 와닿는지 체크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을 이미지화한다면 그 내용이 더욱 강조되겠지. 글과 그림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가닿겠지.


초반 그림체를 잡기 위해 클라이언트와도 몇 번의 미팅을 더 가졌다. 원고에 대한 서로의 감상평을 나눴다. 공통적으로 차분하고 담담한, 건조하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떠올렸고, 이를 일러스트 톤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덧붙여 내 평소 작업물에서 특징점을 잡아, 이 프로젝트에 응용하기로 했다.


1. 차분하고 건조한 저채도의 톤

2. 연필로 그린 듯한 드로잉적 요소 

3. 패턴 요소 사용해 지루하지 않도록


그리고 클라이언트와 작가님이 유독 강조하셨던 것, 내 스스로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것. 



작업 의도


1-1. 당신의 엉뚱섬은 안녕하십니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네 이야기를 담은 꼭지. 어른이 된 우리에겐 엉뚱섬도 사라졌고, 빙봉의 존재도 잊혀졌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깊이 깨달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겁이 많아졌다. 원 밖을 나가면, 또 다른 슬픔이 나타나진 않을까, 스스로를 원 안에 가두었다.


<인사이드 아웃>은 나 스스로를 슬픔이에 대입해 본 영화다. 작가님도 그랬고, 대다수의 어른들이 그랬을 테다. 

파란 머리카락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 다니다간, 당신은 영원히 상상할 수 없는, 재미없는 어른으로 남게 되겠죠. 어른인 당신에게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엉뚱섬이 분명 있을 텐데. 하지만 당신은 오늘도, 그 작은 원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군요.

팔자 눈썹의 슬픔이의 모습으로,
당신이 그려놓은 그 작은 원 안에서….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24p


위의 문장을 표현함과 동시에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지레 겁먹고 원 밖을 떠나지 못하는 어른이 된 슬픔이들에게, 잊었더라도 우리 모두에겐 엉뚱섬이 있었다고. 등 뒤에는 우리가 잊었던 빙봉이 있다고.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그들은 늘 존재하니 원 밖으로 함께 나가보자고.


2-4. 내 편이야, 네 편이야?

2-6. 한 권의 책을 갖는다는 것


‘내 편이야, 네 편이야?’는 영화 <컨택트>를 소재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영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며 ‘내 편’과 ‘네 편’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다룬 꼭지. 여기에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고민이 컸다. 


결론은,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리자는 것.

영화의 내용 역시 추상적이니(언어학자가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며 대화한다. 문과 최대 아웃풋 sf 영화), 아예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 스토리의 이미지화를 돕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본 영화는, 충격적. 본래 sf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뻔한 구조와 뻔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컨택트>는 달랐다. 한 편의 현대미술 같기도, 안도타다오의 건축 같기도 했다. 엄숙했다. (이때 드니빌뇌브 감독은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외계 생명체를 ’적‘으로 표현하는 기존 sf와 달리, 언어를 통해 접근하는 방식이 새로웠다. 작가님이 왜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는지, 왜 이 영화를 소재로 차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 속에 쓰인 외계인의 언어는 먹이 수증기에 번지듯 자연스럽고 희뿌옇다. 동시에 원형의 형태를 띤다. 디지털 작업으로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물감을 꺼냈고, 물을 잔뜩 섞었다. 종이 위에 흩뿌렸고, 빨대로 후 후 불고 종이를 움직여가며 형태를 만들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수작업을 여러 방면으로 사용했다. ’내 편이야, 네 편이야?‘에서는 물감으로 사용했다면, ’한 권의 책을 갖는다는 것‘에서는 밋밋한 책의 질감을 더하기 위한 요소로 연필 드로잉을 스캔해 사용했다.


그리고 다음 일러스트는 조금 더 깊은 작업이 들어간다. 



4-1. 나는 여자입니다


해당 꼭지의 제목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감이 온다. 이 꼭지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소재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회’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도 난감했다. 원고에서는 ‘여성‘문제에 대해, 그저 앞선 이야기처럼 담담하고 무던하게 이야기 한다. 현상을 관찰하고, 돌아보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원고의 톤에 맞게 비교적 ‘중립적’으로, ‘무던하게’, ‘여성’과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거다.


처음 그렸던 이미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여자, 두 번째 그린 이미지는 계단을 오르는 여자, 세 번째 그린 이미지는 유리천장에 막힌 여자. 

‘아 너무 직설적이고 촌스럽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아파트 베란다에 서 있는 여자.‘

당시 나는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작품의 주제를 '획일화된 건축물'로 잡았다. 특히 주목했던 건 '닭장 같은 아파트'아파트는 개성을 죽인다. 단절을 뜻한다. 아파트와 여성을 결합한 이미지를 만든다면, 직설적이지 않게, 은유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수직 수평을 맞춰 아파트 사진을 찍었다.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정리한 뒤 반복 시켰고, 이를 다시 트레이싱해서 이미지를 완성했다. 


1-5.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3-4 굉장히 작은, 수많은 조각들


왼쪽 그림은 영화 <보이후드>를 소재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전거도 혼자 타지 못하던 아이가 홀로 자전거를 타기까지. 그 시간의 궤적.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 


단숨에 이루어지는 건 없다. 모든 건 시간이 쌓이고 쌓여, 이야기가 되고, 지금을 만들어낸다. 


오른쪽 그림도 그렇다. 이 책의 꼭지 꼭지에 나왔던 일러스트를 간략화시켜 오선지 위에 배치시켰다. 각각의 파편들은 오선지 위에 모여 음표가 되고, 악보가 되고, 음악이 된다. 


우리의 조각은, 파편은, 단편적인 순간순간은 모두 이야기가 된다. 원고를 읽으며 느낀 생각이었고, 전체 글의 핵심이었다. 





작업 후기


작업 초기에 그림체를 조율하며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출간일이 밭아 하루에 한 장씩 완성해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이게 될까?’ 

'될까?라는 물음은 필요 없다. 무조건 돼야 한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짰다.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이미지를 구상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다. 


작가님은 내게 ’상상력이 좋다‘고 말했다. 오랜 미대입시를 해오며 스스로 ’뇌가 다 굳었다‘라고 생각했던 나였기에, 이 말은 의아하면서도 이유없이 마음이 부풀었다. 

더 좋은 그림을 위해 더 더 많은 자료를 보고, 한 번 더, 두 번 더 생각했다. 원고를 읽고 또 읽었다. 


좋은 상상력이란 글을 이해하고, 레퍼런스를 찾고, 여러 번의 시안을 거쳐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이미지를 기획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기다려준 클라이언트와 작가님에게 감사를)


이 작업이 바탕이 되어, 추후 몇몇 출판사에서도 작업 제안이 들어왔다. 본격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준 소중한 작업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