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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Jun 25. 2021

효(孝)라는 능력과 능력주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에서 살아간다. 능력의 범위를 넓혀 '효'(孝)를 수많은 능력 중 하나로 봤을 때, 나는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형 효자'(부모님은 극구 부인)다. 나는 선천적인 '효'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가족이 보고픈 건지, 집 같은 집이라는 장소가 그리운 건지, 아님 집밥이 땡기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독립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을 찾아뵈려 노력한다. '효' 부문에서 성공을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물론 나는 갈 길이 아득하다. 99%의 아빠 명의로 등록된 내 차(1%)의 각종 딱지와 벌금은 아빠에게 청구되며,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고향집에서 자고 가라는 엄마의 말씀은 귓등으로 듣는 건지, 친구가 술 먹자 하면 술 못 먹다 죽은 귀신처럼 냉큼 술집으로 순간이동을 한다. 하지만 능력주의 관점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거나 오는 전화도 받지 않는 '패배자'들을 나는 욕할 권리가 있다. 이 세상은 최연소 당대표가 말한 적자생존의 세상이니깐 말이다. 경쟁사회에서 효자가 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은 그들은, 노력을 통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비정규직이 고용불안과 산재사고라는 처벌을 받듯, 나와 같은 노력형 효자에게 비난이라는 벌을 받아야 쓰단 말씀이다. 나는 '효'의 피라미드에서 국회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정규직'쯤은 되니깐.  



하지만 이러한 관점과 능력주의는 다 개소리다. 말이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마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와 이에 따른 생애 기회(Life chance)의 차이가 있다는 베버의 이론은 초등학교에 실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자명하다 못해 뻔하다. 반장선거에서 햄버거를 돌리지 않으면 반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초등학생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노력형 효자라고 해서 '불효자'들을 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력은 노력하려는 노력만으로는 안된다. 나는 효자가 되려는 노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부모의 경제적 지위(+인간적 지위)와 생애 기회(효를 행할 기회)를 우연히 갖추었을 뿐이다.


첫째, 부모의 경제적 지위. 나는 너무 가난하지 않은 부모님의 재산 덕분에 그들로부터 많은 기회를 받았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며, 삼형제로 인해 쪼들리는 살림에도 우리가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들을 빚을 내서라도 야근을 해서라도 사주셨다. 빚을 내고 야근을 하면 갈비집에서 아기 돼지 삼형제가 20인분을 먹을 수 있었고, 내가 아주 충동적이라 초단기적으로 끝났던 미술 학원, 기타 학원, 피아노 학원도 다닐 수 있었다.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유학 생활을 하며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라는 말이 있듯 나는 지구 반대편에 살며 그들을 급하게 봬야 할 때 못 뵈는 무력감과 공허함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이제 그 괴로운 감정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부모로부터의 충분한 기회 보장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나는 은혜를 입은 고양이가 쥐를 물어오듯 부모님 댁을 찾아갈 뿐이다.


둘째, 부모의 인간적 지위. 나는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래서 존경의 표시로 효를 행한다. 어릴 때 간혹 두 분이서 다툴 때면 동생들과 마치 얼음땡 게임을 한 듯 얼어붙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지금 생각해보면 두 분은 항상 우리가 안보는 곳에서 최대한 조용히 언쟁을 주고받으셨다. 대부분은 그들에 대한 좋은 기억들뿐이다. 항상 남에게 도움을 주셨고 피해를 입었으면 입었지 피해를 면하기 위해 누구를 해하지 않으셨다. 또한 옛날 분들치고 되게 열려있었다. 우리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라 하셨다. 그 무엇이 되든 말이다. 특히 아빠는 60년대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견이 없으셨다. 아빠는 일하며 만난 장애인 분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친구로 지내며 사람을 온전히 사람으로만 보셨다. 


나는 부모님의 열혈팬이라서, 맥도널드의 BTS 세트가 먹고 싶어 아미들이 맥도널드를 찾아가듯, 부모님 댁을 찾아갈 뿐이다. 


셋째, 생애 기회(효를 행할 기회). 나는 부모님 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 거리의 제약이 아주 미약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다. 나의 친구들도 중요한 요소다. 만나면 서로 부모님 얘기를 한다. 서로의 어머니가 건강하신지, 갱년기로 인해 문득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는지, 환갑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영양제를 제대로 사주고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을 자주 나눈다. 자칫 불효를 저질렀다가는 친구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아 내가 사람이 맞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부모님을 잊고 나의 인생에 몰두하려면 그들과 절교하는 방법밖에 없을 정도다. 나는 부모님의 안녕을 까먹을 수가 없다. 


나는 효라는 능력을 행할 기회들 덕분에 부모님 댁을 더 자주 찾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부모님과 갈등을 겪었거나, 부끄러운 인생을 산 부모님을 두었거나, 아니면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데다 만나면 주식 이야기만 하는 친구들을 둔 사람이라면 과연 노력형 효자가 될 수 있겠냔 말이다. 가정불화로 인해 이혼한 부모님을 두고 서울에 사는 내 친구가 명절 때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는다고 내가 그에게 사자후를 토할 순 없다. 왜냐하면 난 그저 운이 좋아 아주 운이 좋아 효자가 될 노력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죽도록 노력해라"라는 말은 죽지 못해 살 정도로 삶이 힘든 사람들에겐 "차라리 죽어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각자만의 생각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을 경청하고 존중하려는 시도의 당위성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옹호는 정말 잘 모르겠다.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돈걱정 없이 유학을 간 후 아버지의 도움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가 펼치는 정글 자본주의는 내가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8살 차이의 연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단 그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한다면 나에게도 메리트는 있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아서 학벌이 나보다 낮고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를 미워해 '불효자'인 사람들을 깔보며 자기만족을 할 수 있다. 난 그날이 오길 기다려야 하는지 아님 무서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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