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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Oct 24. 2021

유학을 마치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 나.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군대를 마치고 난 유학 길을 나섰다. 대학교를 다니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 거기서 더 머물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은 마음도 한가득이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순전히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렇게,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은 내 유학에도 왔다. 모든 사람이 언젠간 죽듯이, 모든 일의 끝은 끝맺음이다. 그 끝맺음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다. 내 유학생활의 끝은 한국에서의 새로운 출발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떠나보내기엔 너무 소중한 나날들과의 이별이기도 했다.


나는 두려웠다. 출국날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점점 엄습했다. 정들어버린 학교를 둘러볼 때도, 어느새 고향 동네같이 익숙해져 버린 런던 거리를 걸을 때도, 친구들과 다시 만나자는 작별인사를 할 때도, 공항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여자 친구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때도, 나는 이것이 다시는 오지 않을 이별일까 두려웠다. 아무리 오랫동안 다짐을 해도, 아무리 예상한 일이라도, 현실의 닥침은 참 버거웠다.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은 슬픔이 돼버렸다. 그 슬픔은 시간이 흘러 크게 옅어졌지만 여전히 날 아스라이 덮고 있다.


나는 후회 없는 유학 생활을 했다고 자부했다. 지금도 그렇다.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즐길 수 있었다. 예고 없이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날 때,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때, 심지어 생업이란 문제가 괴롭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을 피하고 외면할 때도 그들은 내 곁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평생의 운을 그곳에서 모조리 써버렸다 봐도 될 정도로 그들에게 고맙다. 이제 그들은 아바의 'Slipping through my finger'라는 노래처럼 다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렸다. 


그래서 더더욱 난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후회 남는 생활이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라고 간혹 중얼거린다.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나날들이라 내 슬픔은 지금도 가실 줄을 모른다. 현재의 행복이 크면 클수록 미래의 비애 또한 커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아주 먼 옛날의 첫사랑을 회상하듯, 그곳을 생각할 때면 한 번씩 가슴이 사무친다. 


유학 생활기를 적어오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무엇을 어떻게 쓸지가 아니었다. 쓰면서 수시로 찾아오는 그날들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들 속에선 변함없는 나와 그곳과 그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것들을 억지로 끄집어내야 했다. 변한 현재와 변함없는 과거를 동시에 마주한다는 건 참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난 나에게 가장 고마운 존재인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그녀는 내 유학생활의 전부 다 다름없었고 그래서 난 쓰지 못했다. 아직 시간이라는 치료약이 더 필요한 듯하다. 


지금의 난 영국 관련 영화도 드라마도 책도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던 PL과 브릿록도 멀리한다. 난 언제쯤 그것들을 향해 처음처럼 웃을 수 있을까. 어떤 것에 대해 '처음처럼'이기 위해선, 그것이 새로워야 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무지가 제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첫경험 뒤에 오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실체들을 접하는 순간, 처음이라는 마음가짐은 앎에 희석돼버리고 만다. 그래서 처음처럼 이라는 태도는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을 경험한 나약한 나에겐, 그곳에 대한 것들을 처음처럼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돌아와야 했고 다시 그곳으로 갈 생각도 없다. 적어도 아직은 없다. 아니 아무리 힘들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그립다는 이유만으로 첫사랑을 찾아갈 수 없듯이,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련다. 돌아가면 난 여기서와 똑같은 이유로 힘들어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삼모사와 같은 이치다. 여기 있으면 거기가 그립고, 거기 있으면 여기가 그립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굴레를 끊기 위해선,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긴 유학생활 동안 내가 숙고해 내린 결정이고 지금도 그 결정에 후회는 없다. 그리움을 그만하기 위해선 그리워해야 한다. 


런던에 있으면서 난 만남과 이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영원한 만남도 영원한 이별도 없듯, 영원한 연결은 없다. 인간은 시공간적 제약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나의 몸은 하나고 나의 시간도 하나의 갈래로 흐른다. 고로 나는 둘 이상의 시공간을 연결할 수 없다. 한국의 시간이냐, 영국의 시간이냐 양자택일이 최선의 답이었다. 


난 여기서 나름 행복하다. 런던에선 학업과 생업이라는 두 문제에 치이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래도 행복했지만, 여기도 그곳에서만큼 행복하다. 일단 학업이라는 문제가 해결됐고 생업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 동안의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책 읽고 글 쓰고 영화 보고 영화를 찍고 있다. 행복을 수치화할 수 있어서 점수를 낸다면, 아마 여기의 내가 거기의 나보다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이곳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거라 예상하는 이유는 단연코 가족이다. 참 식상한 대답일 테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인지상정이지 않는가. 또 혹자는 말할 수 있다. 가족을 위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버린 자식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근데 이 문제는 가족과 나라는 혈연관계에 얽힌 게 아니다. 가족이 아닌 인간 대 인간,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싶다. 가족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이건 가족이라고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 아니듯이, 내가 당연하다고 치부할 일이 아니다.


받은 게 있으면 갚아야 된다. 나만 좋다고 가족이 동의한 일이라고, 그 말만 되뇌며 전화와 몇 년에 한 번씩 얼굴 비추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다. 빚진 게 있으니 정성을 다해 갚고 싶다. 가족이 날 필요로 할 때, 한 공간에서 얼굴 마주 보고 눈을 바라보고 말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모든 것은 언젠간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새로움에 쉽게 매혹된다. 나 또한 그렇다. 유학을 떠나게 된 가장 근본적인 계기도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신선함을 좇는 인간의 성질은 발전을 불러온다. 그러나 새로움은 한없을뿐더러 곧 새로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익숙하게 된 새로움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새로움을 원한다. 무한반복이다. 새로움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집을 버리고 무지개를 좇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는 감정의 되풀임을 끊기 위해 이성에 귀 기울일 때다.


내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새로운 것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면 원래 자리에 있던 익숙한 것들은 소외된다. 이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과연 옳은 삶의 고리일까를 생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익숙한 것들을, 사실상 더 소중한 것들을 두고 새로운 것을 좇을 타당한 이유는 없다. 익숙한 것들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것들은 잘못이 없다. 나로 하여금 편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만든 죄밖에 없다. 이것이 만약 죄라면 말이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 안의 그림자가 아닌 동굴 밖의 세상, 이데아다. 


더군다나 익숙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마냥 익숙하지만은 않다. 그것들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무궁무진한 새로움들이 가득하다. 내 근처의 것들, 한국, 고향, 동네, 가족, 친구. 이 모든 것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등잔 밑의 새로움이 어둡다. 내 동네 속에서도 안 가본 곳들이 수두룩하고 가족과 친구 속에서도 안 들여다본 것들이 상당하다. 전국 일주도 해본 적이 없는데, 무슨 외국에서 산다는 말인가. 


나는 신이 아닌 인간인 탓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익숙함을 온전히 소중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익숙함을 지키고 보살피기로 결론지었다. 익숙하고 소중한 것들을 내 지척에 잡아두기도 벅찬데,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설 힘도 여유도 이유도 없다. 그들이 사무치도록 보고 싶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그들을 그리워하련다. 그래야 난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나. 나는 우리에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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