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 사회의 주요 담론 중 하나는 '개인주의'다. 관련 책들과 강연들이 수두룩하다. 담론을 이끌어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변화해야 합니다'
깊이 공감한다. 한국의 고질적 문제점들은 뿌리 깊은 집단주의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근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얇은 종이에도 양면이 있듯이, 세상만사에는 장단점이 혼재에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무작정 맞다'라는 의견은 옳지 않다.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그 사이에 서있어야 한다.
개인주의자란 '자신의 목표와 욕망을 행사하는 것을 촉진하며, 따라서 개인의 독립과 자립에 가치를 두고 개인의 이익이 국가나 사회집단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회나 정부의 기관 같은 외부 요소들이 개인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다 보기에도 듣기에도 좋은 말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 팽배한 집단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려는 지금 이 변화의 시점에서 저 말들은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집단주의가 그렇듯, 개인주의에도 큰 맹점들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의 가장 큰 오류는 바로 이 사실을 심히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다'
인간이 만약 완벽한 존재라면 우린 꼭 개인주의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 아무런 사회적 제약과 통제가 없더라도 우린 완벽한 존재니깐, 완벽한 개인이 모인 완벽한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안다. 인간이란 무한한 우주의 티끌인 지구에서 먹이 사슬 꼭대기를 차지해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별거 없다는 걸 말이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의 유무이다. 인간에겐 이성이란 것이 있지만 동물은 본능만을 따른다. 그래서 인간은 지구에서 짱을 먹을 수 있었던 비범한 생물체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줄곧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감정이란 길을 걷다가 그 길의 절벽 앞에서 동전 쓰듯 이성을 꺼낼 뿐이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감정의 길로 돌아선다.
결국 개인은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비완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한 인간들은 집단을 이루고 사회로 발전시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유기적으로 채워준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의 집단주의는 과도한 경향이 있지만 종종 긍정적 효과를 낳기도 한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는 개인의 좋은 삶에 제약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나쁜 삶에 제동을 걸어주기도 한다. 잘못된 길 위에 서있는 인간에게 교통표지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혹시 멈출 수 없더라도 최악의 폭주를 막아주는 방지턱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거의 모든 집단에서 적용되는 일인데, 예를 하나 들자면 '교사'라는 집단과 '학생'이라는 집단을 들 수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교사는 법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할 수 없고, 제자들 앞에서 모범을 강요받기에 자신의 진정한 말과 행동을 하기 어려우며, 정보 전달이라는 단순한 가르침을 넘어서 지혜 전달이라는 복잡한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아주 바쁜 개인이다. 외국의 교사보다 훨씬 더 무겁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그들은 진실된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기에, 잘못된 개인이 교사가 될 확률이 낮으며 잘못된 교사가 막 나가더라도 낭떠러지로 추락할 일은 드물다. 이러한 환경 속에 학생들은 보다 안전하고 올바른 교육을 받으며, 미래에 올바른 어른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사회적 선순환이 일어난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학생(청소년)들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학교와 공부라는 시공간에 얽매여 있어야 하고, 연장자 앞에선 자신의 본모습이 아닌 존경과 예의로 가장된 모습을 강요받고, 부모님을 주축으로 한 가족의 간섭이 이끄는 대로 생활을 해야 한다. 외국의 청소년보다 훨씬 더 무겁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그들은 진실된 자아를 표출하기가 서울대 들어가기 만큼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에, 개인이 잘못된 청소년이 될 확률이 낮으며, 잘못된 청소년이 폭주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나빠지겠다고 작정해도 신경 쓸 게 한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 드라마 중에 'Peep show'라는 시트콤이 있다. 이 시리즈의 첫 화에서 주인공인 중년 직장인 'Mark'는 콜라를 마시며 길을 걸어간다. 약간 외진 곳에 들어섰을 때, 한 무리의 꼬마들을 만나고 Mark의 어설픈 외양과 행동거지를 보며 조롱을 퍼붓고 콜라를 빼앗아간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다. 집단의 본분을 장려하는 한국 문화가 적어도 청소년들의 범죄대상을 제한하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 근거는 한국 청소년 범죄율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의 청소년들은 범죄를 많이 저지르지 않는 편이다. 한국의 청소년 처벌법은 촉법소년이라는 핫한 단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가볍다 못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무죄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요즘 것들은 글러먹었다'라는 뒷담화를 하며 촉법소년에 대한 반대 여론에 동참하지만, 솜털 같은 제도적 환경을 감안할 때 한국의 청소년들은 상대적으로 꽤 나쁘지 않은 듯 보인다.
반대 의견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한국의 집단주의가 무조건 사회의 선순환을 일으키고, 본분을 지킴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들은 집단에 억눌려있기에 더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집단주의의 장점도 분명 단점만큼 이 사회를 통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는 집단의 본분을 요구하기에 한국의 각종 사회 시설과 사회 서비스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효율적이고, 수많은 집단 사이에는 경쟁이 생겨나기에 한국의 각종 민간 시설과 민간 서비스들은 외국에 비해 질 높은 편리함을 제공한다. 접수와 처리가 신속한 관공서, 다양하고 접근성 좋은 주민편의시설, 당일 접수 당일 진료가 당연한 널리고 널린 병원, 빠르고 어디든 가는 배달, 오늘 시키면 오늘 올지도 모르는 택배, 높은 인터넷 보급률과 세계 최고의 속도, 쾌적하고 편리한 지하철, 다채로운 먹을거리와 서비스 좋은 식당 등. 우리는 한 집단의 구성원이기에, 집단주의의 부작용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 집단주의의 순기능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러한 편리함은 외국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그곳은 개인주의 문화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집단은 개인을 넘지 못하고 개인은 개인에서 그친다. 나 자신이 중요한 것이지 그 이상의 것, 그 이외의 것을 굳이 바라지도 이루려고 하지도 않는 문화가 사회 전체에 짙게 퍼져있다.
그래서 그곳은 한번 또라이는 엄청난 또라이로 변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매우 보기 드문 수준으로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위험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이상하리만큼 많이 봤다. 그러한 사람들은 한국에도 있지만, 거기는 그러한 사람들의 수가 눈에 쉽게 띌 정도로 많고, 그 위험한 신념의 정도와 수준이란 한국의 또라이들이 감당할 레벨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곧 법이며 우선 가치인 그곳에선, 잘못된 개인을 억제하고 계도할 문화적 수단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 사태만 봐도 그렇다. 공동체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마스크 반대 시위를 하며, 백신 음모론은 음모론에서 뚝 그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 시민의 평균적 수준은 정말 높다. 한 국가의 시민 수준이란 시민의식이 결정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올바르게 견지하는 태도를 갖춘 개인들이 한국에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자유, 독립, 자립은 근사하게 들리지만 사회, 정부, 기관, 집단에선 뭔가 찝찝한 냄새가 난다. 그러나 우리는 찝찝함을 느낄 때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기회를 얻는다. 인간의 불완벽함이 몰고 오는 강추위를 때깔 좋은 옷만 입고는 버틸 수 없다. 크고 두꺼워 몸을 가누기에 조금 불편한 그런 찝찝한 옷들을 입어야 할 때가 있다. 우린 이 두 가지의 옷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때깔 좋지만 따뜻한 그런 옷을 개발해야 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그 사이 어딘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