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트레인지타임 Oct 24. 2021

옥시덴탈리즘

Occidentalism(옥시덴탈리즘)이란 Occident(서양)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앞 장에서 다룬 Orientalism의 반의어로 볼 수 있겠다. 즉 동양이 가진 서양 세계의 편견을 말한다.


난 옥시덴탈스러운 농담과 장난을 주로 즐겨했다. 물론 나의 옥시덴탈리즘도 정통적이지 못했다. 귀여운 수준이었다. 처음엔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항하는 성격이 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무 재밌었다. 정말 순수하게 말장난으로 괴롭히는 거 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 친한 친구 사이에서만 말이다. 


우리 과에 보기 드문 미국인 한 명이 있었다. 영국으로 유학 온 흔하지 않은 미국 인재인 이 친구는 정말 미국인스러웠다. 온몸에서 아메리칸의 향기와 아우라가 퍼졌다. 영화배우 '크리스 프랫'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친구였다. 이 친구 놀려먹는 일이 내 일상 속 가장 즐거운 재미 중 하나였다.


학교 앞에는 펍이 하나 있었다. 각자 수업이 마치면 거기로 모이는 게 학교 생활 루틴이었다.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약속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거기로 가면 친구들이 있었다. 그 펍은 만남의 장소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루는 펍에 가보니 이 미국인 친구가 잔뜩 화가 나있었다. 그는 학교 매점에서 일을 했는데,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할 수 없게 된 부조리로 인해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이런 농담을 던졌다.


"야 너희들 볼링포컬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 보니깐 마트에서도 총 팔던데, 가서 한 개 구해오지 그래?"


"닥쳐"


친구들과 펍에서 놀다 보면 잠시 대화가 끊길 때가 있다. 그럼 난 이때가 기회다 싶어, 무조건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이런 말을 했다.


"야 재밌는 말 좀 해봐, 재밌는 미국 이야기 말이야 아메리칸은 뭐든지 스펙터클 하잖아"


"닥쳐"


이걸 몇 번 하니, 내가 그를 넌지시 보고 있노라면 그는 실소를 터트리며


"닥쳐"


가 자동적으로 나왔다. 사전에 화를 제거하려는 재빠른 선제 조치인 셈이다. 


영국인 친구들도 내 표적에 있었다. 길거리에서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길을 헤맨다 싶으면, "젠틀맨, 네가 나서야 되는 거 아냐?"라고 하질 않나. 정말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며 "너희들은 여기도 맛있다고 할 것 같은데"라고 하질 않나. 진짜 갖은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예외는 없다. 국적, 성별, 나이, 성 정체성과 같은 요소에 관계없이 모두 다 공평하게 내 먹잇감이었다. 놀리는 맛이 참 쏠쏠했다.


그 친구들은 이제 내 곁에 없다. 이제 이러한 무지막지한 농담도 할 수가 없다. 일부는 아직도 런던에, 일부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현실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조만간 다시 그들을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들의 안녕을 바랄 뿐이다. 


한국에 있으면서 외국 문화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옥시덴탈스러운, 서양 문화에 관한 질문들이 주를 이룬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난 이제 그들을 변호하는데 힘쓰고 있다. 내 먹잇감은 내가 지킨다. 그들이 안녕해야 나중에라도 그들을 놀릴 수 있다. 


한국 사회에 퍼진, 유럽을 포함한 비아시안국가에 대한 편견 중 가장 흔하고 완고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은 엄청 자유롭잖아. 모두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살고 남 눈치 안 보고 개방적이잖아"


우리가 말하는 외국이 백인 주류 국가, 유럽권 국가라고 한정했을 때, 저 생각은 맞다.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꼬집고 넘어가고 싶은 건, 집단주의에 억눌려 사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그들은 매우 자유로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이, 성별, 인종과 같은 외부 요소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하는 개인주의 문화가 한국 집단주의 문화와 비교되어 대조 효과가 크게 작용한다.


우리는 그들을 대부분 영화와 드라마 같은 미디어를 통해 접한다. 네모난 상자 속 그들은 참 특별해 보인다. 근데 그 상자 속에 들어가면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영상 스토리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을 다루지 않는다. 미디어는 대개 평범치 않은 소수의 사람, 즉 자유도가 비현실적인 사람이 겪는, 이 세상에 있을 법하지만 사실상 없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반화시킨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실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자유 정도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들도 가정과 같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지키기 위해 직업 또는 직장이 있으며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사회 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은 짬짬이 알바를 해야 했다. 우리나라처럼 부모님의 지원이 당연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한국 대학생들의 자유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집안의 장녀인 한 친구는 어린 동생을 챙기는 모습이 유교걸에 버금갔으며, Curfew(통금)가 있는 친구들도 꽤 흔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정반대의 길을 걷는 친구들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불가능한 환경 탓에 좌절하고 슬퍼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곳에서도 사회경제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신이 아닌 이상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의 자유를 가진 외국인은 없다고 봐도 만무했다. 적어도 나는 미드나 외국 영화에서 나올 법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내 친구들은 범생이들이 아니라 예대라 그런지 꽤 특이한 친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세상 만물은 상대적이라는 가정 하에, 해석하기 따라 그들이 우리보다 자유롭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정말 어처구니없어하는 또 다른 옥시덴탈리즘이 하나 있다. 이것은 내가 꼭 깨부수어야겠다. 이 편견은 한국인이 할 소리가 아니다. 


"걔들은 성적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이잖아".


'성적으로 개방적'이란 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성관계'를 맺는 것에 개방적인가. 둘째,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개방적인가. 내가 만난 많은 한국인들은 첫 번째의 의미로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나는 이 질문을 많이 순화해서 적고 있는 것이지, 직접 인용을 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그들이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개방적이라는 인식은 틀렸다. 틀려도 한참 틀렸다. 잠자리를 가지는 것에 개방적이라는 편견은 정통적 의미에서의 옥시덴탈리즘에 해당된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모욕이고 비하다. 게다가, 이건 젊은 한국인들이 할 소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보다 덜 했으면 덜 했지 그들이 더 하지는 않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의미는 맞다고 생각한다.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개방적이었다. 처음엔 그들이 늘어놓는 성적 이야기가 참 낯간지러웠다.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민망한 그런 경우다. 그들은 성관계를 포함한 성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딱히 스스럼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끄러워 숨겨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 꼭 드러내야 하는 이야기였다. 하나, 이것마저도 한국 젊은이가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나 나름의 최선의 변론을 했다. 이제 이 글을 영어로 번역해 친구들에게 보여줄 거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생각하고 변호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나의 옥시덴탈리즘스러운 농담은 그 깊이를 더하고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들을 대면하고 면전에다가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그날이 얼른 오기를 희망한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전 23화 오리엔탈리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