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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Apr 27. 2021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

'아 수학 공부해야 되는데'


나는 현재 수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방송사 취준생에게 수학이 가당키나 한가. 그런데도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리는 생각이다. 무언가 할 일이 남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날 때, 나도 모르게 저 말을 계속 중얼거린다. 그러다, 잊었던 할 일이 문득 생각나면 '수학'의 자리를 '오늘 해야 할 일'이 채운다.


'아 작문해야 되는데'

'아 읽던 책 마저 다 읽어야 되는데'

'아 친구한테 연락해야 되는데'

'아 집 청소해야 되는데'

...


중고등학생 시절, 나에겐 수학이란 잡힐 듯 잡힐 듯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았다. 문과생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이란 과목에 제일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나, 돌아오는 성적표의 수학 칸에는 항상 제일 낮은 등급이 찍혀있었다. 수학 등급이 낮을수록 내 자존감은 낮아졌고 내 걱정은 그에 반비례해 날로 커져만 갔다. 중고등학교 약 6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 수학 공부해야 되는데'라는 주문을 외웠다, 승려가 "나무 아비타불"을, 목사와 신부가 "아멘"을 외듯. 이제 저 말은 내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아마 임종 직전에도 욀 듯하다). 현재의 나에게 '수학'은 '해야 할 일'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염려하며 수학 공부를 했는가?. 내가 걱정한 것은 나의 부족한 수학적 사고방식인가 아니면 부족한 수학 공부량이었던가. 둘 다 아니었다. 내가 진실로 두려워했던 건 부족한, 미래의 성공 가능성이었다. 수학 점수가 낮았고 그 성적으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으며,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할 거라 믿었다. 즉 성공이 아닌 실패의 삶이 내 앞에 놓여있는 줄 알았다. '순진한' 나는 수능 성적을 '인생의 성적표'로 여겼었다.


저 '어리석은' 생각은 이 사회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은 대학 진학률 68%로 OECD 국가 중 독보적 1위다. 2위 캐나다는 58%, 3위 영국은 49%로 그 뒤를 잇는다. 한국에서 10명 중 약 7명이 대학을 간다는 말인데, 이 수치를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70%는 학문적 호기심과 탐구심이 충만하여 벌이를 포기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비싼 돈을 내가며, 배움의 길을 택한 지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따분한 교과서를 못 견뎌해 표지와 제목엔 낙서가 가득 하지만 즐겁게 '견디는' 만화책의 제목에는 낙서의 흔적조차 없고, 학교 또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의 아침 공기는 따갑지만 친구나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의 아침 공기는 상쾌하다는 걸.


우리 대부분은 공부를 싫어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결코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하는 직업 또는 직장을 얻기 위해 '죽도록' 공부한다. 독서실과 스터디카페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틀어박혀 공부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주로 목표로 하는 직장이란 '좋은 데'이다. 연봉과 복지와 근무환경이 좋은 곳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곳. 그 '좋은 데'를 가기 위해 사람들은 자유를 제한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독서실과 학원의 삶을 택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좋은 직장은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예측한 공산주의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한, 좋은 삶으로의 지름길인 좋은 직장은 소수에게만 그 문을 연다. 좋은 직장의 대표적인 예인 공기업을 준비하는 공시생의 수는 최대 50만 명으로 추산되고 평균 공부 기간이 2년 2개월에 달한다. 하나, 공기업의 수는 350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공기업 채용 경쟁률은 가히 '바늘구멍'이다. 특히 한국조폐공사의 2021년 하반기 공채 경쟁률은 975.5 대 1을 기록했다. 공기업과 업무 분야에 따라 경쟁률은 천차만별이지만 평균 경쟁률이 128.1 대 1이나 되는 바늘구멍을 왜 다들 통과하려 애쓰는 걸까. 좁은 길에 과도한 수의 사람이 몰리면 분명 압사사고가 일어날 텐데 말이다.


'안 좋은' 직장의 낮은 임금, 저급한 복지와 근무환경 같은 시스템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문제는 한국 유일의 문제가 아니다.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 (원제' Sorry we missed you')라는 영화 내용은 이렇다. 택배 회사에 취직한 영국인 리키는 비정규직으로 하루에 14시간을 일하며 해고가 두려워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도 언제나 출근을 한다. 리키가 겪는 불행한 일들은 한국의 택배 기사가 겪는 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18년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반(反)정부 시위를 벌인 주된 이유는 노동자들의 빈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는 독서실과 스터디카페가 없다. 그들의 공기업 경쟁률도 한국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그들에게도 분명 좋은 일터와 '나쁜' 일터가 구분돼 있음에도 그들 대다수는 공부를 해야 갈 수 있는 좋은 일터에 굳이 목매지 않는다. 마치 햄버거에 들어간 토마토가 먹기 싫으면 빼내면 되듯, 그들은 공부를 못하거나 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않는다. 도대체 진정 무엇이 우리에게 공부를 강제하는 걸까?



프랑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소비사회에서 사물은 기호와 이미지로 그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는 실재가 사라지고 기호와 이미지만이 넘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거짓, 가상) 시대에 살아간다'. 사람들이 명품 가방을 구매하는 이유는 '물건을 넣어 들고 다니기에 편하도록 만든 용구'라는 가방의 실재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동경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기호 가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공부의 실재적 의미('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는 변질된 지 오래다. 티브이에선 공부 잘해서 성공한 사람의 썰과 그걸 신기해하는 출연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공부 못함'을 희화화하고,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전문가들이 나누는 '상식'이라는 콘셉트로 전문 지식을 대중화하며, 좋은 대학을 나온 출연자 밑에 달리는 '명문 대학 출신'이라는 알록달록 대문짝만 한 자막을 통해 학벌을 독려한다. 즉 똑똑함이란 머리가 좋거나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가지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머리가 나쁘거나 지적 호기심이 없는 사람도 어느 정도 꼭 갖춰야 하는 능력이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공부는 마치 건강 관리처럼, '하기 싫더라도 인간이면 꼭 해야 하는 것'이 됐다. 공부의 보편화이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듯 공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공부 머리가 없는 사람에게 공부를 해서 똑똑해지라고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공부로 좋은 직장을 들어가라니. 키가 작은 사람에게 키를 더 키워서 높은 선반 위에 놓인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닿지 않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굶주림이라는 벌을 받듯 공부를 못하면 우리 사회는 벌을 내린다. 고졸, 비정규직, 임시직, 일용직과 같은 체벌의 회초리로 무시, 비하, 홀대, 하대, 저임금, 과로사와 같은 매를 맞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벌을 받지 않기 위해 공부라는 발버둥을 친다. 그 발버둥의 끝이 좋은 직장이면 어련히 행복하련만, 현실의 대다수는 도서관과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며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눈물을 쏟는다. 공부는 보편화됐지만 우리의 머리는 보편화되지 않았을뿐더러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만화 '송곳'의 대사 중 하나가 떠오른다. "패배는 죄가 아니야.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고 우리는 단지 평범한 것뿐이라고". 많은 것들이 그렇듯 공부 또한 강제돼선 안된다. 공부는 하고 싶은 사람만이 해야 하는, 그런 사회가 돼야 한다. 공부를 안 하거나 못하는 건 지극히 평범한 것이고 우리는 평범해지지 마라고 강요해선 안된다. 한국의 다른 지역 이름은 모르면서 "미국 수도는 워싱턴, 인도 수도는 뉴델리"라는 '상식'을 외워서 우리의 삶은 과연 편해졌는가. "다른 나라의 수도를 알아서 뭐해?"라고 생각하는 '무식한' 외국인보다 '똑똑해서' 우리는 정녕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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