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답게' 죽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나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까

by 박놀

저는 여전히 내심 ‘아름다운’ 죽음을 바랐고, 고통 없는 ‘자발적’ 소멸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생각 많은 버드나무님께서 호스피스 병동 얘기를 해주시며, “수녀님들의 목적은 종교 전파가 아니에요. 그곳에서 함께하는 많은 분들이 ‘고통 없이’ 정말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죠.”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에 조금은 깨달았습니다. 아, 같은 언어로도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구나. 삶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가지며 신체적 고통에만 집중했던 저와 다르게 인간으로서 삶을 어떻게 ‘존엄하게’ 끊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신체와 정신을 좀 더 ‘편안하게’ 마주할 방법을 성찰하는 자세가 제가 추구했던 ‘아름다운’ 죽음보다 좀 더 아름답게 보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략)


생각 많은 버드나무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제가 저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느끼는 ‘안타까움’을 ‘무례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해서 감추려고 했습니다. 마치 그 사람의 회복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쓸 때를 기준으로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더듬어 봤을 때, ‘안타까움’은 우리가 잃어버린 삶과 죽음의 공존을 잇는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할 수 있도록 ‘작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회복을 어떻게 진심으로 염두에 두며 함께 짐을 짊어질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 보겠다고 다짐하며,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자발적’인 죽음보다 ‘자연적’인 죽음을 마주해 보고 싶은 것 같아요. ‘자발적’ 죽음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신체 질환이 신체적으로 저를 옥죄었을 때, 저 자신이 살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만큼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안타까웠거든요’. 그때 제 몸이 조금은 소중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그런 걸 보면 죽음은 ‘선택’하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끝맺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어요.”


- 안병은 수원시자살예방센터장님과 작업 중 생각 많은 버드나무님과의 인터뷰에서 -




죽음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 것은 '자발적인' 죽음을 고민하게 되었을 쯤부터 '자연스럽게' 이뤄졌지만, 사실 어디까지나 이 자연스러움은 '강제적'으로 삶을 끊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향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이 고통이 없어진다면 참 이상적이겠다."라는 '기이함'에 가깝기 때문에 굉장히 상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제가 '자연스럽게' 꿈꾸게 된 '아름다운' 죽음은 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이 발생하는 '아프지 않은' 죽음인 것인데 이것을 과연 자살을 반대하는 사회가 자연스럽고 괜찮은 것으로 볼까라는 것이죠.


물론 저는 자살을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요즘 드는 생각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자살을 반대하는 사회에서 찬성을 외치는 용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말이 나오는 편이지만, 나머지 두 번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요즘의 저는 예전의 저와 다르게 섣불리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예전, 저는 '충분히' 죽음에 대한 성찰을 했다면 '자연스러운' '자발적'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때의 제가 안락사를 찬성한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연스러운' '자발적' 죽음, 그러니까 자발성과 자연성이 양립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믿고 싶습니다. 자발성과 자연성이 죽음과 아름다움 속에서 공존 가능하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비겁하고 지질하다고 저를 욕해도 저는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자발성이지, 자연성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 '아름다움'을 막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어느 날, 죽음을 선물해 달라고 빌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제 마음속에 존재해 왔던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여러 상상과 가정을 하며 그 속에서 여전히 죽지 못하고 괴로움만 더 커지는 제 모습이 보이자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결국 저는 믿지 않는 신에게 빌었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도 죽음은 선물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괴로움은 괴롭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가정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만드니까요. 저 역시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어쩌면 바로 그 괴로움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괴로움 내지는 '아름다운' 꿈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저에게 그것은 현재로서는 죽음이 가장 가깝다고 예상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저 같은 사람이 더 드물겠죠.


죽음을 위해 산다니.... 그건 자살을 옹호하고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살을 옹호하진 않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지금 당장 죽고 싶다고 말한다면, 저는 말릴 겁니다. 왜라고 묻는다면, 아주 간단하게는 후회할지도 모르니까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에 대한 제 생각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기는 합니다. 차라리 예전이 명확하다면 더 명확했죠. 하지만 때로 명확함은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그때가 그런 순간이지 않았을까 오늘도 짐작해 봅니다.




문득 자칭 죽음 성찰가이자 타칭 자살 시도자로서 ‘아름다운’ 죽음을 꿈꾸기 위해 제가 오랫동안 매달려왔던 나와 4와 5의 연관성에 대해 조금 말씀드려보고 싶어 졌습니다.


먼저

나와 4는 쓰는 방식에 따라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4는 죽을 사에 대응하여 죽음을 상징할 때가 많습니다.


그다음

나와 5는 나 오를 구성하는 뜻 그리고 음과 같은 발음으로써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5는 4 다음 숫자입니다.


여기까지

동일시되는 나 그리고 4와 차별화되지만 동시에 단계화되는 나 그리고 5는 어쩌면 나다'운' 나다'움'이 죽음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물론 이 가정은 어디까지나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한 사람의 힘없는 짐작일 뿐입니다. 어느 날, 홀린 듯이 작성했던 적이 있는 다양한 상상과 가정 속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글처럼 큰 의미가 없는 발견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나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행위를 현실에서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상상에선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동시에 할 수 있는 일 역시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그 점을 오히려 이용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조금 모호하지만 삶도, 죽음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서 어느 쪽이든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 때까지 돌봄을 실천하며 사랑을 꿈꿔보겠다고 다짐하며 말입니다.


해당 글에서 저는 22년 초의 저를 중심으로 상상이 가득한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습니다. 22년 초의 저는 자기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하기 위해 나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자기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찍질에 가까웠기 때문에 너무 무기력했습니다. 실제로 그 순간의 저는 바삐 활동하다가도 우울해했고, 그럴 때면 잠만 잤습니다. 약을 새로 먹기 시작해서 더더욱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의 양상이 변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부분부터입니다. 저는 존재하지 않는 독자분들께 그런 제가 미래의 저와 통화를 하게 됐다고 그리고 그것을 현재의 저라는 시선에서 바라보는 상상을 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여긴 모든 가능한 상상 속 세계이니 불가능한 일은 없을 거라고, 만약 개연성을 부여하고 싶다면 잠에 취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고 가상의 그들을 달래면서 말입니다. 결국 그때나 미래나 '나'란 존재는 잠을 자며 회피하는 일을 좋아할 것이고,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포용력 속에서도 글의 흐름에는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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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22년의 저는 (아마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서 느끼는 의아함만큼이나) 이게 뭔가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상대방이 미래의 '나' 자신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온전히 얘기해 본 적 없는 감정들을 정확하진 않지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그녀는 종종 울고 있었고, 22년의 자신이 지금 당장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2년의 저는 그건 정말 쓸모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통화 상대방이 정말 미래의 자신이라면 자신은 좋든 싫든 여전히 살아있을 거라는 얘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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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의 온기가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져서일까요. 여느 때처럼 침대에 기력 없이 누워있었던 22년의 저는 "그래요. 내일 죽으려고 하긴 했어요. 별의별 상상을 다 해봤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요."라고 힘없이 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핸드폰 너머에서 "하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땐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라며 여전히 불안감을 억누르지 못하는 목소리가 반복되자 알 수 없는 감정이 폭발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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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요. 그럴 일은 없다고요. 그렇게 걱정되고 할 일이 없다면 부족한 공부나 더 하는 게 어때요."


비아냥에 핸드폰은 그제야 침묵을 선택했지만, 22년의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포는 공포로 잊히는 법이니까요. 당신이 정말 미래의 저라면, 어차피 저는 지금도, 그때도 고통 때문에 사는 것보다 죽는 걸 두려워하고 있을 테니 그런 꿈은 어차피 이뤄지지도 못하겠죠.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때의 전 '나' 하나 챙기기도 벅찬 상태였고, 미래보다도 지금 당장 어질러진 방처럼 엉망이었을 그 순간이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상상은 거기에서 끝납니다. 사실 이미 충분히 다소 허무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이 얘기에 대해 제가 설정한 결말은 더욱 허탈합니다. 이후 핸드폰 너머 목소리는 지금의 저에 이를 때까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그렇게 한 번도 미래와 대화해 본 적 없는 저만이 남았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는 이 글을 쓰며 미래의 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기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그때도 자살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후폭풍에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22년 초의 저는 지금의 저에게도 굉장히 모호하고 어려운 존재입니다. 일단 그때의 기억이 거의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로부터 1년이 채 되지 않아 실제로 자살 시도를 했고, 또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23년 초가 되었을 땐, 유서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작성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글들을 가지고 있는데 가끔 “죽음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 그걸 살펴볼 때면 저조차도 그때의 저 자신이 조금 ‘위험’하다고 느껴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전의 저는 '충분히' 죽음에 대한 성찰을 했다면 '자연스러운' '자발적'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설령 그것이 자살이나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더라도 그때의 저는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긍정하는 경향이 있는,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된 계기는 바로 그해 5월 5일 새벽 4시경에 충동적으로 저를 소개하는 수필을 적어 한 사이트에 올리면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처음에 그 글들은 죽기 위한 조건을 이룰 수 없음을 스스로가 감안하고 다시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잠깐 삶을 영위하는 수단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이 글들이 제 삶의 의미에 죽음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도 저는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살리고 싶어 했습니다. 비록 저만큼은 죽이고 싶어 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향한 제 감정은 상당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방금 전까지 제가 잠깐 했던 가정이 상당히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상상 속에서도 삶과 죽음 둘 중 어느 한쪽으로도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저의 모습에서 저는 여러 다른 미디어에서 마주쳤던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꿈이 '아름답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아름다운' 꿈만큼 본인의 '안타까운' 아름다움도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고 계속 희망합니다. 물론 이 희망은 예전 제가 신에게 지금 당장의 죽음을 빌었으나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요.


사실 저도 저를 사랑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솔직히 이 두 감정이 지금 죽음으로 예정되는 제 모호한 꿈을 명확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 건 적어도 아름답게 즉, 안타깝게 죽기 위함이니까요.




이처럼 제 글은 주로 일주일을 되돌아보며 삶과 죽음을 고민하고, 최종적으로 죽음을 꿈꿔보'려'는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저처럼

세상 관념에 따라 죽음을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으신 분들,

정신질환 혹은 정신적 어려움으로 인해 죽음에 매몰될 수밖에 없으신 분들,

죽음을 꿈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던 이의 삶이 궁금하신 분들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사람들과


죽음의 다양한 가능성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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