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기 위해 글을 썼다

쓰고 싶은 글을 다 쓰면 죽을 거야. 나는 그걸 위해 노력하고 있어.

by 박놀

죽음을 위한다. 그건 죽음을 적극적으로 고민할 때 이뤄지는 것이었어요.


무작정 갈망하고 행동하는 건 죽음을 향해 좀 더 빨리 달려가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후회를 부를 수밖에 없어요. 필연적으로요. 왜냐하면 죽음이 도망가거든요.


(생략)


우리는 지금 코끼리의 일부분만 만지고 있을 뿐이에요. 코끼리로부터 멀리 떨어질 때, 그렇게 만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코끼리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뭔가를 마주하고 갈망한다는 건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설 때 이뤄지는 것 같아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속 물러서자 자해, 자살, 죽음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그제야 죽음은 삶이 함께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포기했어요. 자살은 삶을 버리는 행위니 까요. 그런데 삶을 마주한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더라고요. 말씀드렸다시피 마주한다는 건 한 걸음 물러서는 거고, 그건 제가 자해, 자살, 죽음을 방패 삼아 삶을 회피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 23년 6월 19일 일기에서 -




왜 여기에, 아니, 어쩌다가 이곳까지 왔냐는 질문에 “삶과 죽음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고 싶어서요.”라고 답하며 애써 장난스럽게 “이왕이면 죽음이었으면 좋겠네요.”라고 덧붙였던 게 22년 11월이었는데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회의감을 느꼈던 순간으로부터 벌써 2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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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즈음부터 지금까지도 저는 거의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당시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답지 않게' 다소 들떠 있었던 건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에 입원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나름의 사색에 빠진 건 좀 더 멀리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에 대한 생각이 좀 더 복잡해졌지만, 그때 저에게 죽음은 ‘이런’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다양하고, 사소하고, 또 동시에 무거웠는데 굳이 정리해 보면 ‘평균'에 속하지 못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삶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 20살에 죽을 각오를 하다가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에 입원한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흔하지 않은 경우를 경험하게 된 것도 사람이 준 상처 때문이지만 저는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도울 수 없으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면 그들을 좋아하는데 다가가지 못하는 공포감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지금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때 정말 죽을 각오를 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억하는 모습은 두려움에 망설이고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결국 저는 자살에 ‘실패’했습니다. 생명에 거의 지장도 가지 않은 아주 멀쩡한 상태로 아주 허무하게 말입니다. 그게 또 약해 보이고,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아서 싫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평균에는 사랑스러움뿐만 아니라 고통을 견딜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현실에서 사랑받을 수 없으니 사랑과 사람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힘을 키우거나 그대로 생존에 실패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실패하긴 싫은데 더 이상 힘을 키울 힘이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친구도 없고, 공부를 아예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손에 꼽게 잘하는 것도 아닌, 심지어 외모도 못난 멍청이에 불과했던 저는 ‘잘’ 살 자신도 없었고, 솔직히 살아볼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그쯤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제가 봤을 때 저는 일단 삶과 죽음 중 죽음을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소 어두웠던 서두는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써 제 발로 병원에 입원하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저는 삶과 죽음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이왕 제가 바란 대로 죽음을 선택했을까요? 안타깝게도 1년 가까이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던 저의 큰맘 먹고 나선 병동 여행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허망하게 끝나버렸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고 선언한 후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맹장이 부풀면서 얼마 가지 않아 퇴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죽음으로 추정되는 것에 좀 더 이르게 도달하기 위해 자살을 준비하는 저의 여정은 주로 집에서 이뤄졌습니다.


한때 저는 이 여정을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는 "죽음을 위한 삶"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3년 5월, 일차적으로 완성된 이 계획 속에서 저는 본격적으로 죽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을 꿈꾸'려'는 마음이 많은 이야기가 그러하듯 기승전결의 형태로 전개된다면, 저는 감히 그것이 적절한 조치 없이는 죽음이란 정의'할 수밖에 없었던' 답과 끊임없이 갈등하다가 현재에는 충실하되 미래에는 자살하겠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시도보다는 미룸과 폭발 속에서 균형을 잃고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항상 죽음을 확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삶을 사는 게 너무 막막해서 그리고 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 너무 두려워서 임의로 답을 정의 내렸던 것이 바로 죽음, 정확히는 자살이었을 때도 있고, 무엇보다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삶을 다시 갈망하고 싶다고 갈등했을 때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무뎌졌고, 죽어야 한다는 확신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자살이 유일한 구원 혹은 도피처처럼 느껴져서 그렇다기에는 다른 분들은 저처럼 자살하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에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당시 저는 제 죽음이 자살이란 형태로 이뤄질 거라고 확신했고, 그렇게 명백히 구별되어야 할 자살과 죽음을 동일시하면서 죽음에 비참함이란 이미지를 덧씌웠다는 겁니다.


그 이미지는 굳건했습니다.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짐작했을 만큼 말입니다. 딱 한 번 약 3달 정도 고집 같은 결심을 철회했을 때도 있지만, 그뿐입니다. 그땐 지금 당장은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앞으로도 죽음을 꿈꾸려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 그게 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저에게 자살은 삶으로부터 저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패에 가깝기도 했습니다. 입시 후유증으로 인생을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러니 인생 따위 살고 싶지 않다고 절망했을 때에도 쓰고 싶은 글을 다 쓰면 죽을 거라고 다짐하자 몸과 마음을 잡아먹는 우울, 불안, 무기력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저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꿈꾸'려'는 죽음이 미룸과 함께 완성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애초에 이미 저는 정신적 '작은' 죽음에 도달했고 그토록 바라는 죽음이 이런 형태에 불과하다면 이젠 죽음이 아니라 삶을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입니다.


이 작품은 결코 '편안한'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긍정하려는 경향이 있는 '위험한' 청년의 '위험한' 글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죽음은 단순히 그것을 꿈꾸려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좀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