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하고 싶다면, 가짜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지 말 것

25년 7월 셋째 주

by 박놀

자해, 자살, 죽음을 미루는 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꿈 혹은 경험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후회하지 않고 죽기 위해서예요.

저는 죽음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고요. 죽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 후회 없는,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미루고 있어요. 상담 선생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고요. 생각은 변화한다고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제 가치관도 변화하겠죠.

저는 알아요. 아마 만약 여러분이 죽음을 고민해 본 적이 있다면 여러분도 아실 거예요. 지금 죽음을 선택하는 건 충동적인 선택이고 후회를 부른다는 걸요. 그래서 죽음을 미루고 있어요. 아름다운 죽음을 찾기 위해서요.

그러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이유? 그런 건 몰라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죽고 싶은 이유가 너무 많은걸요.

저는 그저 후회 없이 죽기 위해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꿈 혹은 경험하고 싶은 것, 나를 설레게 하고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후회를 불태우기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어쩌면 그 후회는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태우고 있고 그 순간에 집중하고 있잖아요. 그럼 덜 괴로운 것 같아요.

이번 글은 제가 죽음을 향한 초심을 조금 잃어버린 것 같아서 적어봤어요. 자꾸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요. 그리고 부담감을 느끼죠.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부담을 갖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안전망 위에서 삶을 고민하고 있답니다.

죽음의 충동을 느끼시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23년 5월 20일 일기에서 -




종종 저는 저 자신이 ‘현실’과 분리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생각보다 강렬한 이 현상은 종종 저를 외로움, 우울, 불안, 무기력 등 소위 부정적 감정들이 가득한 늪으로 끌고 들어갔고, 심한 경우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그래서 결말은 ‘단순한’ 마무리밖에 없을 것만 같은 낭떠러지 바로 앞까지 스스로 걸어가게끔 했습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서는 본인 곁에 거의 반드시 붙잡아 둬야 하는 ‘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어리고,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지도 않고, 전문 자격증도 없지만, 죽음을 꿈으로 정의했고 여전히 정의하려는 사람으로서 감히 그것을 고민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접근하고자 하는 생존의 가능성, ‘현실’은 사실 일반적인 결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일반적인 얘기를 일반적이지 않게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정리하면, 저는 정답 대신 가능성을, 제시가 아닌 제안으로 표현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실 생존을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정답의 표본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오답의 본보기로써 자신을 정의하게 되었을 때부터 저는 확신을 회피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용기가 사라진 저에게 무조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속된 말로 말이 아닌 방귀에 가까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삶을 왜 살아야 하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개 반응이 비슷했습니다.
그냥 살아야 하니까.
너에겐 소중한 사람들이 있잖아.

그냥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럼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도 되냐는 물음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하게 느껴졌고,
소중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럼 나 자신은 소중하지 않냐고 소리 지르고 싶어질 만큼 더 좌절되는 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 따위는 굳이 찾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그건 애초에 왜 간절하다고 판단했던 마음과 달리 스스로를 죽이려고 했던 시도에 실패했는지 고민하기 위해 제 발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내릴 수 없는 결론에 좌절하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그곳에서 나와야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결말이긴 했습니다.



그때 저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불러오는 과정에서 발생할 고통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도, 죽음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지금 당장은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때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했지만, 그만큼 삶도 '선택'하고 싶어 했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때, 죽음을 향한 초심을 계속 잃어버리는 자신에게 더 이상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걸 멈추라고 말했던 것은 결국 살아야 하는 이유에 그냥을 말하던 바로 그 공허한 대답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삶은 나에게 부담을 준다. 그러니 죽겠다.

이 논리는 삶에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삶을 다시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지쳤다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지치게 한 세상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이든 이젠 그냥 잠들고 싶다는 마음이든 삶과 죽음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모든 건 후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지쳐버린 소중한 내가 후회하지 않으려면 삶은 나의 '작은' 복수를 눈치채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고, 죽음은 정말 그곳에 도달한다면 잠들 수 있는 건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삶을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죽음을 강조할 '자격'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생존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곁에 붙잡아 둬야 하는 '현실'은 그런 '자격'을 비롯한 나 자신을 어느 정도는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살기 위해서든 죽기 위해서든 일단 선택을 미루며 나를 힘들게 하는 가짜 현실은 멀리하되,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진짜 현실은 마주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흔한 얘기지만,

삶을 긍정하지도, 죽음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를 괴롭게만 하는 현실은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종종 나를 아는 진짜 현실을 잃어버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가짜 현실 속에서 깊은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 순간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쩌면 그것을 직접 마주하지 말고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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