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무척 오래된 비닐 파일에 든 종이와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를 열어보니 천원 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나왔다.
''이게 뭐야?''
접혀 있는 종이 쪽지를 펼쳐보니 막내딸이 고등학교 시절 적어 놓은 지구과학 선택을 한 학급의 회계 장부다. 학생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 뒤에 '장난', '졸음', '자리 이동' 등, 규칙 위반 내역과 벌금 액수가 나열되었다. 아마도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학생들에게 벌금을 걷고, 그걸로 아이스크림 파티 따위를 하다가 잊어버리고 남겨진 것 같았다. 벌써 10년이 훨씬 지나 어찌할 도리가 없는 돈이다.
아이는 공부는 중위권이었지만 지구과학에 대한 열정이나 자부심만은 최상위권이라 할만큼 대단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가끔씩 지구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분야가 지질학이었다. 나는 인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은 꽤 많았다. 더구나 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전공 분야와 가까운 문학작품을 주로 읽어온 터라, 퇴직 후에는 뭔가 새로운 분야에 관심이 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고 시절에는 홀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40대쯤에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를 읽고 엄청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활한 우주의 작동 원리나 별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서 블랙홀이나 중력 이론 같은 천문학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었는데, 좀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니 너무 어려웠다.
그러다가 뉴턴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책 '프린키피아의 천재'를 읽고 과학을 공부하는 자세라고나 할까? 자연과학에 관한 독서를 할 때는 소설이나 인문학에 관한 책을 볼 때와는 다른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뉴턴이 빛을 연구할 때 태양을 너무 오래 바라보았기 때문에 실명할 뻔 했다든가, 눈에 바늘을 찔러넣는 위험한 시도까지, 그 극한적 태도가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나는 과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세밀하게,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반복해서 보기보다는 소설류를 대할 때처럼 설렁설렁 넘어가 버렸다. 그러다보니 수박 겉핥기식이 되어 독서량은 수십권에 달했으나, 정작 어떤 현상이나 이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이 글에서 언급할 책은 내가 퇴직 후, 지질학에 관심을 두고 읽었던 관련 서적 30여 권 중, 좀 인상에 남는 것들이다.
이언 골딘의 '테라 인코그니타'는 내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했던 세계 곳곳, 더구나 우리 지구의 깊은 속이나, 우주 공간도 마찬가지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나온 '지질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지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화산 활동이나 대륙의 이동설, 생물의 탄생과 멸종 등, 흥미로운 과학적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정지곤 외 2명이 쓴 '암석의 미시 세계'에서는 100가지 정도의 암석들을 편광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어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으로 분류한 다음, 안산암, 현무암, 응회암, 등으로 세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너무 어려운 전문적인 분석 기법을 적용하고 용어도 생소한 것이 많아 읽기에 힘들었다. 암석들을 찍어 놓은 사진들도 현미경으로 확대해 놓은 것이라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가 없었다.
지질학을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려면 이런 전문적인 서적을 많이 읽으면서 지식을 쌓아야 할텐데 기초가 없으니 걱정이 되었다.
권동희가 쓴 '한국의 지형'은 우리나라의 산이나 강, 평야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 여러 연구 논문을 인용해 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주상절리나 카르스트, 돌리네 등 우리가 관광지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 경관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도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자주 오르는 북한산 자락에서 많이 만나는 화강암이 단단하지만 잘 부스러지고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명칭들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토르, 보른하르트, 타포니, 나마, 박리 등, 어떤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거기에 대한 관심이며 애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철수 외 2명이 쓴 '화석과 만나는 자연사 여행'은 경상남도 지역의 고등학교 교사 3명이 집필한 것으로 화석이 있는 장소를 직접 찾아 보고 사진 등, 관련 자료를 상세하게 수록해 놓았다. 학교에서 수업 연구를 하고, 교과 지도를 하기도 바쁜 게 고등학교 교사의 생활인데, 먼 곳을 찾아 다니면서 화석을 수집하고 분석했다는 게 정말 대단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달에 2번 정도는 지질 탐사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트에 꼭 탐사를 하고 싶은 곳 20곳 정도를 목록으로 작성해 놓았는데 몇 번으로 그치고 말았다.
장순근의 '망치를 든 지질학자'는 우리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지질학적 현상이나 화석에 대해서 여러가지 사진들을 보여 주면서 쉽게 설명한 책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공룡 화석을 발견한 에피소드나, 황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찾아낸 이야기들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귀족들의 취미 생활의 하나가 지질학이었다는데, 나도 귀족적인 취향이 있는게 아닐까? 그런데 나는 세계 곳곳, 아니 우리나라 지역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여유가 많지 않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함께할 동료라든가 배울 선생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쉬운대로 강원도 영월에 있는 건열 구조, 화성에 있는 공룡화석지, 한탄강 지질공원 등은 지질학도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찾아간 곳이다.
책에서 본 것과 직접 현장에 찾아가서 확인한다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직접 탐사에 나서면 우선 대상을 대하는 태도나 집중력이 훨씬 높아진다.
관광을 겸한 지질 탐사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화산 분화구, 주상절리, 용암동굴, 등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지질학적 지식을 활용해 이런 모습으로 변해온 과정을 상상해 본 것도 쏠쏠한 재미를 더해주었다.
내가 티비에서 가장 즐겨 보는 프로 중의 하나가 세계테마기행인데, 아이슬란드나 하와이의 화산 활동이나 남미의 독특한 지형을 생생하게 촬영한 영상을 보면 너무 재미있고, 정말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지질학에 대한 전문가가 나와서 자세히 설명까지 해주는 프로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서대문구청 가까이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공룡화석이나 여러 암석의 표본들을 자세히 살펴본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대전에 있는 한국지질연구원에도 가보았다. 서울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일반인들의 흥미를 끄는 것보다는 좀더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최덕근은 '지구의 일생'이란 책에서 45억년에 걸친 지구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고 있다.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빙하기, 등, 아득한 시간의 역사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은 얼마나 찰나에 불과한 것인가? 지질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그런 덧없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일까?
아득한 과거에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우주 먼지가 뭉쳐져 별이 탄생하고, 그 별의 한 조각으로 떨어져 나온 지구가 바다와 육지로 갈라지고, 산맥이 생기고, 그것이 또 쪼개지고 뒤틀리는 과정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가?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지질학 공부에 할애할 생각이다. 비록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비하면 체계도 잡히지 않았고, 깊이도 없지만, 그래도 이 학문에 대한 흥미나 애정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막내딸이 고등학교 시절 지구과학을 좋아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분야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는 것처럼 나도 지질학에 대한 용어 하나만 나와도 귀를 쫑긋대면서 한 마디 거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늬만 지질학도라고 비아냥댈지라도, 나는 지질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