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가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도 함께 아침밥을 먹고나서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다급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보! 빨리 외출 준비해. 같이 광화문에 나가야겠어.''
정년퇴임을 한지 몇 해가 지나 달리 하는 일도 없는터라, 아내가 어디 가자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따라 나설 처지지만, 그래도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느라 왜 나가야 하는지 물었다.
아내의 말인즉슨 오늘이 삼월 삼일, 즉 '삼겹살 데이'라, 광화문에서 10 시부터 4 시까지 삼겹살을 1 인당 5 키로씩 반값에 판다니, 빨리 가지 않으면 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양돈 농가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한돈'에서 추진하는 판촉행사란다.
금방 티비에서 방송나왔다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예전에 어느 축제 현장에서 공짜 도시락 하나 타려고 길게 줄을 섰던 낯뜨거운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가지 말자고 했다.
아내는 같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 한두 군데 전화를 하더니, 화를 막 내면서 혼자 길을 나섰다. 막상 아내가 나가고 나니, 나는 후환이 두려운 건 둘째치고, 영 마음이 불편해서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세종대왕 동상 앞에 서서 넓은 광장을 바라보니, 봄을 알리는 따스한 햇살이 축복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긴 줄을 형성한, 행사장 비슷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에게 어디 있느냐고 전화를 했더니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오란다. 그쪽으로 갔더니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아내의 모습은 금방 구별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긴 행렬도 보이지 않고, 아내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행사가 시작된지 30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물건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6 시간 동안 행사를 하겠다고 홍보를 해놓고, 반 시간도 안 되어 파장이라니?''
더 울화가 치미는 건, 여기저기 한 사람이 서너 개씩이나 행사 물품을 들고 가는 모습이 여러 명 눈에 띄는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한 개씩만 판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람들 중의 아무나 붙잡고, 어찌된 일인지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머리의 열을 식히기 위해 근처에 있는 청계천을 걸으면서, 미숙한 행사 운영자와 남의 몫까지 가로챈 몰지각한 사람들을 향해서 실컷 욕을 퍼부었다.
걷다보니 점심 때가 가까워져서 우리는 근처에 있는 광장시장으로 갔다. 인산인해를 이룬 미식가들이 수없이 늘어선 포차들 주위에 입추의 여지없이 둘러앉아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예전에 거기서 맛있게 먹었던 한우육회비빔밥과 녹두전을 시켜서 막걸리를 한잔 하고나니, 오늘의 해프닝이 훗날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여유로운 마음이 되었다.
오늘 티비를 보고 삼겹살을 사러 나왔다가 허탕칠 사람들도 우리처럼 이리로 흘러들어와서 한우 비빔밥을 시켜 먹을까?
그나저나 '한돈 판매 촉진날'이 '한우 판매 촉진날'이 되는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