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수없이,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떠올리곤 하는 화두는,
''내가 죽은 다음에,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주위의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고 철저히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위에서 언급한 질문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가끔씩이라도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죽음 이후에 올 수 있는 평판에 대해서 좀더 심각하게 생각하게된 계기는 두 친구의 장례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나와 그런대로 가깝게 지내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는 두 명이다. 이들 두 사람은 나와 동갑내기 고등학교 동창으로 오랜 기간 교류를 해 왔는데, 한 명은 내가 직장 생활을 하던 광양에서, 또 한 명은 자녀들이 있는 서울에서 주로 만나는, 이를테면 서로 다른 친구 그룹에 속해 있었다. 둘 다 어려운 시기에 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하고, 결혼해서 자녀까지 두었는데, 예순을 얼마 앞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그런 비슷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할 당시의 그 친구들의 태도나, 그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얼마 전, 나는 친구들과 함께 거의 십년 전에 죽은 그들 중 한 친구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는 경기도 평택의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설을 조금 지난 산야는 푸른 빛을 잃고,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을씨년스러운 겨울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회색 건물로 들어서자, 마치 도서관의 책장처럼 칸칸이 늘어선 공간에, 하얀 유골함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문틀마다 어김없이 조문객들이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은 작은 조화와 쪽지들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 유골함에 깃들어 있을 망자의 영혼들은 그런 것들로 자기를 기리는 추모객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을까? 여하튼 우리는 거기서 차를 마시면서, 그 친구에 대한 추억에 잠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는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중 누군가가 제의를 해서 그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한두 번은 방문을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몇 해 동안 친구들과 모임을 가지지 못하는 등, 우리는 그 친구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아내가 우리들이 그곳을 방문해 주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주위에서 배우자를 잃고, 홀로 지내는 사람들을 여러 명 보기는 했지만, 그들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친구는 직장에서 노동 운동을 하다가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고, 오랜 기간 여기저기 떠돌면서 한량으로 지냈고, 그의 아내가 일을 나가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서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 친구의 아내가 멀쩡한 남편을 두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어쩌면 그런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남편의 친구들에게까지 자기 남편을 기억해 달라고 추모공원에 다녀오기를 부탁하고, 식사까지 대접해 주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남편의 친구들을 만날 때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우리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 친구는 죽기 전에, 몸이 아프다거나 평소와 다른 언행을 보인 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아침, 늦은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직장에서 돌아온 아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그건 그 친구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상태에서도 집안 살림에 폐가 되었는데, 만약 반신불수가 되어 살아남았다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야 했을까?
우리는 모두들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가, 거의 사흘 동안 꼬박 장례식장에서 함께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친구의 처는 우리 친구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전화도 하는 등, 친분 관계를 이어왔고, 이번에는 직접 조문해 주기를 부탁했던 것이다.
다른 한 친구의 죽음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 친구는 자기가 몇 달 후에 죽을 것을 알고 미리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변 정리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 사정을 식구들은 물론 알고 있었겠지만, 주위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죽기 전 가족들에게 자기가 죽은 다음에 주변 사람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가 30년이 넘도록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지 몇 해가 지난데다,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내가 그 친구와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그의 죽음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는 장례를 치른지 한 달도 더 지난 후에야, 그 친구의 아내로부터 부고를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자연히 알 수밖에 없을 터이고, 어쩌면 그것보다는 서로 정산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30여 년을 살았던 그 동네에는 고등학교 동기 네 집이 반경 2키로 정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달이 회비를 거출해서 적립해 놓고, 적어도 한두 달에 한 번씩 부부 동반으로 식사 모임이나 나들이를 함께 하고, 해외 여행도 여러 차례 했던, 나름대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다가 그 친구의 아내가 이 동네에 계속 살아야하는 상황이었기에 이 사실을 끝까지 알리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들은 정말 배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묘한 심정이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많은 시간들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는가?
우리 세 사람은 49재 날에, 그 친구의 유골을 안치해 놓은 절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나서 며칠 후, 그 친구의 아내는 우리를 마지막으로 만난 회식 자리에서 모아두었던 회비를 정산하고, 우리 모임에서 빠지기로 했다. 사실상 이제부터 우리와의 인연을 끊겠다는 의사 표시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해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평생을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고, 꽤 많은 유산도 남겨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친구가 낫기 어려운 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 혹시라도 자신의 치료비로 재산을 탕진해서, 남은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주위에 자기의 상태를 알리지 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뒷얘기를 나누었다.
어찌 생각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그의 마음이 가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과연 그를 그렇게 보내야 했던,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고 고맙기만 했을까? 도리어 주위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같은 것을 안겨준 건 아닐까? 여하튼 그 친구는 죽은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흔적들을 깨끗이 지우고자 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미리 자기 주변을 정리한 다음에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는 어떤 존재로든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당신은 죽은 다음에, 자신의 주위에 남아 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은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에서,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 어머니를 추억하는 장면을 이렇게 서술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은, 이별은 불가피하게 찾아온다. 그러나 진정한 죽음, 영원한 이별은 물리적,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조금이라도 친분을 가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는데.''
라고, 오랫동안 떠오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요즘 거리에 나서니 스산하던 겨울 바람이 다소 누그러져 있다. 지금 산과 들의 땅밑에서는, 새싹들이 서로 먼저 올라오려고 부지런히 채비를 하고 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