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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Jun 08. 2023

먼 기억 속의 싱클레어

데미안과 나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나자, 화사한 벚꽃이며 복사꽃들이 온 천지를 뒤덮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은 산과 들이 온통 신록으로 물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서 청춘의 시기를 화려한 꽃에 비유한다. 그만큼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기에 나온 말이리라. 하지만 그 아름다운 날들은 너무나 짧고 꽃은 연약해서, 언제 어디서 불어닥칠지도 모르는 바람에 떨어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내 젊은 시절도 그러했다. 중고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육체적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힘이 넘쳤던가? 그리고 지금 그 시절을 되돌아 볼 때,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가슴 뜨겁게 사랑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현실 세계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넘치는 열정을 어디로 발산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특히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가정이나 학교에서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법규에 대해 배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인생관은 서 있었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어두운 힘은 눌러도 눌러도 끊임없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착하고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수없이 반사회적인 행동을 상상하고, 온갖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때가 많았다.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쓴 채, 위선적인 삶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꽃처럼 아름답고, 세상을 온통 뒤덮을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청소년기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나는 나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마음에 의해 살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리 힘들었던가?''


싱클레어의 독백은 바로 그 시기의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데미안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좀더 빨리 안정적인, 좀더 의미있는 인생의 행로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싱클레어처럼 소심하고, 거친 바깥 세상에 여간해서는 적응하지 못하는 얼뜨기였다. 나는 이마에 표식이 없었고, 데미안과 같은 이상적인 친구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무슨 일에서나 자신감이 없었다.


한 학년이 3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보다 열 배도 넘는 큰 규모인 읍내의 중학교로 진학한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친구를 골라서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거의 존재감 없이 지냈다.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야트막한 뒷동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들 사이의 골목길을 오가며, 하루종일 집 앞을 흐르는 강가에서 세상사를 잊고 노닐던 어린 아이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영악한 도회지 아이들의 한가운데 내던져져 눈만 멀뚱멀뚱 뜨고, 어떻게 처세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유년시절의 껍질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되도록이면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세상을 견뎌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시기에 내가 좋은 책들을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집 책장에는 세계 명작 소설들이 많이 꽂혀 있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 같은 것은 또래들에 비해 한참 부족했지만, 정신적인 깊이라든가 감성적인 면에서는 그들보다 나았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친구를 몇 명 사귀었고, 새로운 환경에 나름 적응했다. 중학생 정도 되면,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환경이나 성격이 다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그런 의미에서 또래들보다 상당히 늦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터라 그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화제의 내용이 어떠한가와는 상관 없이, 그런 시간들이 내 정신적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삶이란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무엇보다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큰 소득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가두고 있는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내가 그 시절에 '데미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물론 그것 외에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 책은 그 당시 나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투영해 놓은 것처럼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싱클레어의 모습을 통해 나는 나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심리적 모순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내 앞에 닥쳐올 세계와 마주하는 것을 더이상 겁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현실에서 데미안과 같은 완벽한 사람을 친구로 두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소설이라는 가상 세계 속에서 간접적으로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고, 인생이란 보다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화려한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무성한 잎들과 머지않아 맺을 열매들, 앙상한 나뭇가지들에서도 저마다의 매력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니, 그래도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왔다는, 대견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데미안이 되고, 피스토리우스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내 주위를 거쳐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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