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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22. 2022

눈 오고 바람 분다

백석, 호리  다쓰오 ' 바람이 분다'





눈이 왔다. 안에서 바라보는 눈 풍경이 근사하다.

백석 백기행(1912~1996)은 월북시인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80년대 후반에 해금, 복권되었다. 그런 분이 되살아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백석은 1990년대 중반, 과거 동거녀였던 김영한이라는 할머니의 통 큰 시주로 뒤늦게 유명세를 탔다. 김영한은 한때 대원각이라는 요정의 주인이었는데 건물과 토지를 조건 없이 절에 넘긴 것이다. 그 대단한 재산도 백석 시 한 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명언도 남겼다. 이런 사랑꾼 김영한을 추억하는 뮤지컬이 있는 것도 좋겠지.

시인은 한 때 1963년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1996년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뮤지컬의 여주인공이자, 나타샤이고 싶었던 김영한은 1999년에 사망했다. 만일 이분들이 노인이 되어서도 서로 살아있음을 알았더라면 어떤 회한에 사로잡혔을까?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참 영리하게 제작되었다. 그들은 불과 3년간 만나 사랑한 사이였다. 1936년에서 1939년 사이로 보인다. 김영한은 그 3년은 영원히 잊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한 남자와의 사랑을 별처럼 간직하고 싶어 했을 것 같다. 만일 그 남자가 바로 옆에서 같이 해로했거나 접근 가능한 곳에 있었더라면 그런 대접은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지지도 닿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연인이기에 그리움이 더욱 애절했으리라.

그 그리움은 높은 곳에서 반짝인다. 누구든 감히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곳에서. 그녀는 백석이 주었다는 문제의 그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이고 싶었을 것이다. 나타샤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김영한에게만큼은 나타샤는 본인이다.

안도현의 ‘백석 평전’(2014)을 읽어보면 백석은 인기 많은 미남이었다. 여자들은 시인을 사랑했고 시인도 여자들을 사랑했다. 시에 나오는 그 나타샤가 누구든 시를 쓴 당시에는 어느 특정한 여인이 나타샤였겠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또 다른 나타샤도 등장했던 것 같다. 그 시를 받은 사람은 김영한 한 분뿐은 아니었으니. 나타샤란 사랑의 알레고리 같은 것 아닐까. 시인이라서, 예술가라서 다 용서되는 이야기이다.

시는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라고 시작한다. 문득 호리 다쓰오의 ‘바람이 분다’를 생각한다. 백석은 이 시를 1938년에 발표했다. ‘바람이 분다’는 1937년에 출판된 소설이다. 애수 띤 분위기, 순애보, 낭만적 사랑의 정경을 엿볼 수 있다. '바람이 분다'의 아래 단락을 읽으면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떠오른다.당대의 로맨티시즘이 느껴진다.

‘나는 몇 년 전, 이런 쓸쓸한 겨울, 산골 마을에서 사랑스러운 한 여인과 단둘이서 세상을 등진 채 서로 애달피 사랑하며 지내는 모습을 종종 꿈꾸던 시절을 떠올린다. 소싯적부터 줄곧 잊어본 적이 없는 달콘한 인생에 대한 무한한 꿈을 이처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가혹한 자연 속에서 그 상태 그대로 조금도 가감 없이 실현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진정한 겨울, 쓸쓸한 산골에서의 삶이어야 했다’  


백석은 누군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여인을 사랑했고 그녀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싶었다.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라고 했다. 마가리는 평안도 방언으로 ‘오두막’을 뜻한다. 눈과 흰 당나귀, 흰색이다. 나타샤 역시 순결의 여인이다. 이들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기에 산골로 가려한다.


마찬가지로 호리 다쓰오도 겨울, 산골에서 사랑스러운 여인과 단둘이서만 살고자 했다. 쓸쓸하게 애달피 사랑하며. 1930년대식 로맨스의 절정이다. 물욕, 소유욕도 없이 세상을 버린 채로 나의 애인과 묻혀버리고 싶다고 소망한다. 


그러나 작은 소망도 쉽지 않다. 주인공은 춥고 어두운 숲을 헤맨다. 마음에도 바람이 분다. 애인, 세쓰코가 죽어간다. 그는 릴케의 '진혼곡' 몇 구절을 중얼거린다.



아, 오지 말아요. 그리고 만약 그대가 견딜 수 있다면
죽은 자들 사이에 그냥 죽어 있어요. 죽은 자들은 열중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에게 힘은 보내 줘요. 당신의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이따금씩 멀리 있는 자가 나를 도와주듯이, 내 안에서.  



삶은 단순하지 않아서 어느 누군가에게는 무지막지하게 잔인하다. 호리 다쓰오의 ‘바람이 분다’에 나오는 세쓰코는 열렬하게 사랑하는 남자를 남기고 허무하게 죽는다. 모진 바람이 이들의 사랑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쓰코가 죽고 주인공 의 실제 인물인 호리 다쓰오도 49세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백석의 삶 역시 알려진 대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1960년대초반 이후로는 모든 창작활동에 금지된 채로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살았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의 말로가 쓸쓸하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의 알려진 여정을 따라간다. 정주, 함흥, 경성, 만주를 떠도는 시인의 방황, 울분, 눈물, 우수가 그려진다. 1941년에 나온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에는 ‘그런데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이 흰 바람벽엔/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만주 어딘가에 있는 초라한 방안에 누워있다. 흰 바람벽에는 가족, 고향, 부모, 아내 등이 주마등처럼 스르륵 흘러간다. 사랑과 방랑의 운명을 타고난 시인임을 자각한다.


뮤지컬은 김영한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그의 사랑, 슬픔 모두 한 여인이 간직한 액자 속 이미지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자야 김영한에게 욕되지 않고 백석에게도 생채기를 내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못 이룬 어떤 사랑의 비유로 바라보면 된다. 누군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오해였다고, 가짜였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단지 한 여인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바란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되는 거다.

한 사람이 누군가와 사랑했고 그 후 수 십 년간 그를 가슴에 묻어두었다는 것. 그건 비할 데 없는 사랑이다. 누구 못지않게 별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별은 그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다. 그저 저 멀리서 반짝였을 뿐이다. 어떤 사랑은 이처럼 보석이 된다.

눈 내린 밤 별은 더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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