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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25. 2022

한 잔 더

어나더 라운드, 윌리엄 버로스, 정키


예전 직장 동료 중 반듯한 자세와 옷차림으로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 이분은 회식을 할 때도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술에 트라우마가 있어서였다. 이분이 귀가하는 중이었다. 초로의 남자가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속으로 ‘우리 아버지가 병나발까지는 아니지.’라며 지나치는데 그건 단지 아들의 희망 사항이었다. 그 사나이는 바로 자신의 부친이었으니까. 그 처량한 모습에 그날로 술과 작별했다고 말했다.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2020)는 술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어쩌면 슬픔과 좌절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네 명의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안정적인 삶, 편안한 현재에 푹 젖어있다. 중년에 이른 이들은 어제 살던 대로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네 남자는 심리적 위기를 겪는 중이다. 이제는 인생에서 바뀔 것도 없다. 돌이켜 보니 더 이상 젊지도 않다. 흥미나 호기심도 사라졌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는 시간, 돈, 열정 모든 게 부족하다.


어디선가 좌초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에너지는 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 가짜 정열이라도 불러오자. 술의 힘으로. 남자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낮이건 밤이건 늘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자. 처음에는 좋았다. 늘 기분 좋은 흥분에 사로잡혔다. 열정적이고 인기 있는 직장인으로 돌아왔다.


술의 힘으로 삶을 버텨본다. 지나간 젊음, 열정을 그리워하지만 발을 디디고 선 안락한 자리도 포기하기 어렵다. 배부른 아저씨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만은 없다. 이런 영화는 건전하다. 공감을 얻기도 쉽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공허와 탐닉의 세계로. ‘파이트 클럽’(1999)이나 ‘쉐임’(2013), ‘님포매니악’(2014)은 바로 그 주제에 천착한다. 탐닉이라는 건 영혼을 좀 먹는다. 무언가에 영혼을 침식당하고 싶 않지놀랍게도 열렬히 원하는 이들도 있다. ‘파이트 클럽’의 에드워드 노튼이나 브래드 피트, ‘쉐임’의 마이클 패스벤더, ‘님포매니악’의 샤를로트 갱스브르처럼. 세상에는 존재론적 외로움, 피하고 싶은 현실에 직면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매달리려 한다. 죽기 직전까지 상대와 치고받거나 온갖 변태 성욕에 시달린다. 기괴한 방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쯤 윌리엄 버로스(1914~1997)의 ‘정키’를 말해보고 싶다. ‘정키’(1953)는 상당히 하드코어한 소설이다. 마약이나 그 중독에 대한 경고를 하려 하지않는다. 이야기는 거의 버로스의 자전적 궤적에 가깝다. 그는 어떻게 자신이 40여 년에 걸쳐 호기심 많은 아이에서 중증 중독자에 이르게 되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했다. 소설은 ‘문학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선명하고 과감한 르포르타주 이상의 것’으로 작가는 ‘알려진 사실에서 출발하여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도달’하고자 글을 썼다.

주인공은 부유한 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만 했다. 유명대학을 나왔으나 동급생들에게 기피 대상이었고 정신분열증/편집증자로 분류되어 군대도 면제받는다. 재즈시대, 비트 제너레이션 시대다. 어쩌다 보니 마약도 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다른 에 강한 동기가 없었기에 마약 중독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어디에도 강한 동기가 없다’는 것, 이점이 포인트일 것 같다. 이런 사람이니 ‘마약이 당연히 이긴다’. 그는 마약에 저항하지 않는다. 서서히 그 세계에 빠져들어 마약 없는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약물, 중개상, 범죄자들의 세계가 기다린다. 나중에는 미국에서 수형 생활을 피하려 멕시코로 이주했다가 더 센 약물을 찾아 콜롬비아로 갈 준비를 한다. 끝없는 자극이 필요하다.

그 후로도 버로스는 자신의 마약 체험, 성적 방종의 시절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퀴어’(1985)에서는 약물에 취해 순간 환각으로 아내를 총기 살해한 실화도 소개한다. 무서운 일이다.

윌리엄 버로스의 일대기 중 가장 인상적인 건 그가 83세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탐닉의 세월을 보낸 이치고 장수했다. 버로스는 후반기에도 영화, 미술, 음악 분야 다방면의 예술가들과 더불어 협업했고 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최고의 동기는 마약이 아닌 예술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나더 라운드’의 남자들도 처음에는 0.05%의 알코올이 주는 활기가 즐거웠다. 물론 실험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1%까지 올려보기로 한다. 어느 정도 마셔야 1%에 이르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보통 필름이 끊기는 지점은 0.2% 정도라고 한다. 북구 남자들이다 보니 알코올 분해 효소가 넉넉할지도 모른다. 네 남자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음주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이들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셀 수도 없는 술병들이  뒹군다. 이들은 머리가 깨진 채로 길거리에 쓰러지거나 겨우 돌아와 침대에서 엄청난 방뇨하기도 한다. 한 사람은 아예 중독자가 되었는지 직장에도 비틀비틀 횡설수설하며 나타난다. 그는 수치와 분노로 삶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기어코 바다에서 고의로 익사한다.

각국 정부는 마약류는 금지하지만 술이나 담배는 유통하고 심지어 권장한다. 사람들에게는 잠시나마 자신을 잊게 할 탐닉 거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건 권력자든 평범한 사람들이든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도 취한 채 히죽거리는 보리스 옐친과 빌 클린턴의 과거 기록 필름이 공개되었다. 해빙무드란 이런 것. 술을 적당하게 마신 이들의 얼굴은 즐겁다. 낯 모르는 사람에게도 미소 짓는다. 여기서 끝난다면 다들 행복할 터이지만 그건 술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술은 양보심도 타협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에 먹히기 쉽다.

인간은 늘 한쪽으로 기운다. 탐닉은 저울의 추를 더욱 극한으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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