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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an 30. 2022

연결되지 않는 사람들

오시이 마모루, 이노센스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사이버평크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 로봇/사이보그로 충격을 주었는데 정작 본인은 기계는커녕, 타인과의 연결조차 주저한다. 어쩌면 이 감독은 링크되는 공포를 일찌감치 예견했기에 그 촉으로 이런 명작들을 쏟아내었으려나.


나도 간소한 디지털 관계를 유지한다. 지금 같은 방식도 만족스럽다. 보내지 못할 것도 받지 못할 것도 없다. 물론 내 생활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Linked 되어 있다.


편지를 쓰던 때도 있었다. 며칠은 걸려야 도착하는 편지에 주절주절 길게 써 보냈다. 연락하기가 쉽지 않아 한 번 보내면 자세하게 써야 했다. 읽고 있는 책을, 지금 생각하는 것을, 또 상대의 상황을 염려하는 내용보냈다. 쓸데없다면 없는 일이지만 정서적인 울림이 있었다.


누구든 좀 가려지는 면이 있기를 바라왔다. 그건 타인의 영역이다. 한참 후에 알아도 되고 또 몰라도 그만이다.


사생활이 투명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소셜미디어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저 없이 자기를 알리곤 한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다. 익명의 독자들을 향해 자신을 노출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이라니.


오시이 마모루는 이제 ‘감시 사회’, ‘밀고 사회’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누군가 질문하면 응답한다. 자기 스스로도 폭로한다. 생각은 순발력 있게 전파된다. 그저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궁리하던 음란하고 관능적인 이야기, 또는 폭력적인 이미지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마구 시각화된다. '사고=말'이 아니다. 뒤엉켜서 복잡한 것들, 공개하기 두렵고 낯선 것에 플래시를 들이댄 꼴이다. 나를 밀고하고 당신을 감시한다. SNS 사회의 민낯이다.


사람들은 작은 기계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세상과 소통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말은 입을 써서 상대의 눈을 보고 해야 하는 거니까. 그래야 오해 없이 의사전달이 정확하다. 소셜미디어로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대화가 잘 안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연결이라니. 가상의 연결망이 사람들을 잇는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니 한 손으로 전선을 잡고 있는 셈이다. 개인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 자체도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원래 사람들은 각각 소우주라고 한다. 무얼 생각하는지, 어떤 협잡을 꾸미는 음흉한 악마인지 남들은 모른다. 몰라도 되고 또 몰라야 한다. 머릿속에 각자의 서랍이 있어 꼭꼭 숨긴 채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어떤 사람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어도 된다. 타인과 교류를 거부하면서 사막이나 정글, 혹은 바다에 머무른들 어떠랴. 그것이 사람인데.


소셜미디어의 무료 대화에 감동하지 않는다. 원래 공짜인 척 해도 환수하려는 것이 있다는 걸 안다. 엄청난 양의 대화가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아직 ‘절제, 금욕, 신독과 같은 낱말에 고개를 조아리는 전근대적 인물도 있으리라.


인간은 교체 불가능한 단독자라고 배웠다. 그러나 디지털 문명은 인간을 통계 숫자로 취급한다. 아주 평이하고 무개성적이며 타인으로 대체해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고독하고 외로워도 스스로를 독립적으로 지탱하는 인간은 존엄하다. 그러나 현실은 이 존엄성에 도전해 사람을 기계의 하수인으로 만들려 한다. ‘연결’을 부정하는 건 쉽지 않다.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 Ghost in the Shell2: Innocence’(2004)에는 안드로이드/휴머노이드가 여럿 등장한다. 인간과 비슷한 몸과 사고체계를 갖도록 제조된 공산품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위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기계 인간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










영화는 소녀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의 살인과 자폭으로 시작된다. 그것/그녀는 인간과 완벽하게 닮은 외모를 지녔다. 아니, 실제 여자보다 더 아름답다. 그녀는 섹서노이드/가이노이드로 출시되었다. 늘 벌거벗은 채 어떤 방식이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단지 구체관절인형이기만 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그녀는 ‘고스트’를 부여받은 기계다. ‘고스트’를 갖추었기 반발했고 차라리 사멸을 택했다.


이 미래 시대에는 온전한 사람이 드물다. 길거리를 걷는 이들 대부분이 AI나 사이보그 혹은 인간 로봇이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사람들이다. 사이보그와 인간 로봇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영화에서는 두뇌의 일부가 아직 남아있다면 사이보그이고 신경이나 기억까지도 데이터화 해 두뇌도 기계, 즉 전뇌로 대체했다면 인간 로봇으로 부른다.


일부 사이보그나 인간 로봇은 ‘전뇌電腦’를 지녔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도 말했듯이 인간 기계화의 시작은 의료적이다. 처음에는 장기나 피부조직 등 손상된 부분을 교체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점 더 많은 부분을 기계로 바꾼다. 머지않아 의료를 떠나 단지 능력 향상을 위해 신체 일부를 바꾸는 날도 올 것이다. 심지어 뇌를 이식하거나 기계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원숭이 뇌에 비디오 게임이 가능한 칩을 이식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 원숭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종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채로 생을 보낼 것이다.


기계나 원숭이 뿐 아니라  조종할 수 있다. 두뇌를 킹한 이가 대신 생각해주는 시대가 도래했다. 내가 나를 만드는 게 아니고 기계나 타인이 나를 지배하는 셈이다. 그러나 전뇌가 등장한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수도 없다. 이미 똑똑한 기업이나 국가는 이 신 문명을 위한 변명거리 강령/논리를 준비하고 있을 테다.


전뇌 사회에 독자성이 있을 리 없다. 단체로 생각하고 똑같이 정해진 대로, 예정된 대로 행동한다. 지금도 혼자 다르게 생각하는 이는 인터넷 상에서 집단 폭행, 몰매 맞기, 악플의 대상이 된다. 다르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이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통계의 변두리에 있다가 결국 의미 없는 ‘그 외’ 숫자로 전락한다. 대신 다수결은 더욱 극성을 부리고 세상을 조직, 조립한다. 머지않아 세상은 단일 생각이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원제는 ‘껍데기 속의 귀신:순수 Ghost In the Shell 2:Innocence’이다. 데카르트식 ‘기계 속 영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미래인들은 이 철학자를 편협하게 오마주 한다. 그들에게 인간의 겉모습은 기계든, 무기물이든 관계 없다. 심지어 뇌조차 기계화한다. 인간에게서 ‘고스트’를 뽑아내 전뇌에 이식하기만 하면 된다. 이 사람들도 영혼, 그것만은 제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다. 영혼만은 순수 엑기스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본격적인 Linked를 망설인다. ‘연결’이라니. 인간은 원래 ‘섬’이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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