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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Feb 04. 2022

내일이 있으니까

체호프, 갈매기, 바냐아저씨, 드라이브 마이카


마음의 우상이 있다면 행복하겠지. 누군가의 영향력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살겠다는 다짐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어쩌면 허무해서, 어쩌면 어떤 빈틈을 채우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메워지지 않던 곳이 안 보이면 안심이 된다. 그의 덕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평화를 얻는다면.

숲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완벽한 외모를 지녔다. 물론 소문이다. 그녀는 평가받지 않는다. 누구도 이 처녀 신의 알몸을 넘볼 수 없으므로. 사냥꾼 악타이온이 우연히 아르테미스의 목욕 장면을 보았다. 일부러 찾아간 것도 아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중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는 이런 불상사도 용서하지 않는다. 악타이온은 그녀의 저주로 사슴으로 변했다가 사냥개에게 무참한 죽임을 당한다. 여신은 이런저런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다. 저절로 완전하다. 그러나 이 완벽함은 인간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

안톤 체호프(1860~1904)의 희곡이나 단편을 읽다 보면 맥이 풀리고 기운이 빠지곤 한다. 작가가 진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고 죽은 시기도 사람들을 옥죄었던 사슬을 한 꺼풀 풀어낸 때와 상통한다. 러시아는 1861년에 농노 해방이 있었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제국의 허약함을 전 세계에 알린다. 1905년에는 1차 러시아 혁명이 뒤를 잇는다. 사람들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맹목적인 믿음을 스르르 놓아버린 시기다. 존경하던 인물도 그저 평범하거나 비루한 사람불과하리라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독자는 작품이 내뿜는 짙은 페이소스에 한동안 그 언저리에서 머뭇거린다. 깨달음은 태풍처럼 몰려오지 않는다. 슬쩍, 그러나 어느 틈에 명료하게 밀물처럼 다가와 있다. 그 진실에 못내 씁쓸해진다.

‘갈매기’(1896)에는 어긋난 사랑으로 인생을 소진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르노와르의 '선상의 점심 파티'(1881)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본다. 니나가 숭배하는 보리스는 명성 있는 소설가다. 시골 소녀는 보리스라는 환영적 예술혼에 중독되어 가출한다. 그 후의 삶은 짐작한 대로다. 그녀는 보리스와 동거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아이는 죽고 소설가는 결별을 선언한다. 니나는 유랑 극단의 배우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Pierre-Auguste Renoir, 선상의 점심 파티 The Boating Party Lunch, 1881>




콘스탄틴은 니나의 전락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자기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친 이리나와 그녀의 애인 보리스에게도 환멸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을 속인다. 예술가로서 콘스탄틴은 판에 박힌 형식을 증오한다. 예술은 ‘작가의 영혼에서 자유롭게 흘러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나와 보리스는 습관이나 관성으로 행위하는 이들이다. 예술가 연하지만 진실로부터 한없이 멀다. 그러나 사랑하는 니나는 헛된 이상, 가짜 예술가에게 집착한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좌절하고 사랑에 배신당한다.

콘스탄틴이 갈매기를 쏘는 행위는 상징적이다. 이 장면은 리얼리즘 작가로 알려진 체호프의 작품에 상징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갈매기를 쏘았다는 건 우상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아집, 망상으로부터 떠나고 싶다. 자유에의 갈구는 본인의 자살을 꾀하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진부함, 편견, 상투성의 사망이다. 우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우상은 보통 본인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의 총기 자살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가족들이 옆방에서 식사를 하고 카드놀이를 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아주 일상적이다. 미망에서 파국으로 그리고 새로운 전환을 맞을 때까지 삶은 고요하지만 끈질기게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하게 다른 국면으로 나아간다.

‘바냐 아저씨’(1899)도 존경했던 인물에게서 허상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바냐는 자신의 처남 세레브랴코프에 헌신해왔다. 바냐의 누이동생은 세레브랴코프와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땅을 가져갔다. 집안에서 빚을 내어 산 땅이다. 바냐는 이 빚을 갚아주느라 제대로 배우지도, 즐기지도,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늙어간다.

세레브랴코프는 훌륭한 연구자이자 교수로 칭송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대로 세상 물정을 모른다. 허공을 바라보느라 먹고사는 데 드는 비용이 어떻게 나오는지 관심조차 없다. 그의 생활비는 바냐가 애써서 절약해 보내는 돈으로 충당된다.

바냐는 땅의 노예이며 공짜 일꾼이다. 오랜 세월 희생을 감수한 이유는 처남이 훌륭한 일을 대신 해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 업적이 자신의 봉사 덕이라고 생각하면 흐뭇하다.

이제 은퇴한 세레브랴코프가 영지에 돌아왔다. 마치 자기 장원에 돌아온 영주나 다름없는 태도로. 가까이 본 교수는 희생과 헌신을 바칠 인물이 아니다. 사치스럽고 만한 대다 어린애나 다름없이 유치하다. 세상 시곗바늘이 본인을 해 돌아가야 한다.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교수의 연구물도 형편없기는 매한가지다. 바냐는 회한에 잠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지? 환각에 취한 삶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런 고뇌도 세레브랴코프의 한 마디 선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노후를 위해 이 땅을 팔겠다고 한다. 누이동생의 딸 소냐에게 상속된 땅 아닌가. 바냐는 참을 수가 없다. 이런 작자를 위해 내 삶을 주었던가? 그는 총을 들어 교수를 쏘지만 빗나간다. 교수는 마지못해 장원을 포기하고 도시로 돌아간다.

그다음은 이하동문. 과거가 무한 반복된다. 바냐는 빵 한 조각도 아끼고 절약해 교수에게 생활비를 보낼 것이다. 삶은 지속되어야 하므로.



바냐: 얘야, 난 너무 괴로워.

소냐: 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삼촌 우리는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시련을 꾹 참고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마아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2021)는 체호프의 극을 묵직하게 사용한다. 영화 속 기후쿠의 아내는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이다. 남편은 우연히 그녀가 외도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온 아내였는데. 기후쿠는 마음속으로 아내와의 소통을 거절한다. 아내의 사망 후에도 그녀와 화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진심을 담아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이 쌓아온 미망의 몰락을 인정한다 건 고통스럽다. 우리는 때로 체호프의 인물들처럼 각자의 우상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누구든 흠이 있다.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그걸 발견해도 용서하고 살아가야 하나. 류스케 감독이 체호프를 인용한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쿠의 빨간색 사브 올드 900은 달린다. 부감 샷, 롱테이크로 잡은 자동차 주행 장면은 그 후로도 계속될 삶의 여정에 대한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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