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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Feb 09. 2022

재즈와 탐정

대실 해밋 '말타의 매',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TV 할리우드 영화 덕분에 재즈를 자주 접했다. 재즈 뮤지션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버드 Bird'(1988)가 처음이었다. 재즈는 대부분 부수적인 효과를 노리며 BGM으로 쓰였다. 건달들이 계략을 꾸밀 때면 흑인들은 무대에서 재즈를 연주했다. 등장인물이 위기에 빠졌을 때, 외롭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도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다.


음악은 영혼을 사로잡는 마법을 부린다. 감수성이 강할 때 듣는 음악은 평생 깊은 인상을 남긴다. 듣기로는 중증 치매에 걸린 이들도 자신이 좋아했던 음악을 들려주면 의미 있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재즈를 들으면서 스마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렉트릭 기타의 찰리 크리스천(1916~1942), 트럼펫의 클리포드 브라운(1930~1956), 알토 색소폰의 레스터 영(1909~1959)이나 드럼 배틀의 진 쿠르파(1909~1973)나 버디 리치(1917~1987), 스윙의 왕 베니 굿맨(1909~1986) 등의 연주가 흘러나올 때면 왠지 쓸쓸해진다. 아마 그 구식 분위기, 사라진 연주자들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멜 토메(1925~1999)의 ‘Blue Moon’에 감격했던 기억도 있다. 눈물나게 반가웠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Clifford Brown with Strings’는 현악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일품이다. ‘Yesterdays’, ‘Laura’는 비 오는 날 많이 들었다. 뜨거운 트럼펫에 오그라들다가도 감동한다. 이런 곡들에는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것 같아도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는 분위기가 있다. 내부는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른다. 블루스의 힘이라고 할까. 현실적으로는 패배한 듯 보이지만 흑인 특유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클리포드 브라운은 25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 탓인지 그의 음반은 최고 수준인 채 멈추었다. 감수성의  박물관이다.


레스터 영은 사진만 봐도 성격이 짐작된다. 오른쪽으로 기운 머리,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표정, 꿈꾸는 눈. 콜맨 호킨스 같은 남성적 색소폰이 주류로 인정받던 시절에 레스터 영이 빅 밴드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미스터리하다. 화려한 음색의 플래셔 핸더슨 밴드에목을 받지 못했으나 느긋한 리프를 선호한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는 메인 역할도 했다. 자유롭고 은근한 레스터 영의 음악이 좋았다. ‘Love Me or Leave Me’,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이나 ‘Prisonor of Love’ 등을 들으면 지난날 어느 양지바른 언덕이 떠오른다. 이런 시절은 다시없겠지만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레스터 영은 쿨의 진정한 창시자가 아닌가 한다. 흑인이되 흑인만의 음색이 아닌 모던 재즈의 본향과 같다.  괜히 재즈의 대통령Prez으로 불린 건 아니다.

   

비밥 중에서는 찰리 파커의 ‘Now’s the Time’을 처음 접했다. 이건 감상용 음악이다. 여기에 맞춰 춤을 추지는 못했을 테니. 그런데 듣고 앉아 있기가 너무나 불안하고 울적하다. 아무리 속사포 같은 템포로 숨 가쁘게 연주해도 그 정서가 어둡다. 당대의 실존적 외침을 담으려는 듯한 묵직한 사운드가 절절하다. 캔버스의 두툼한 티에르를 음악에서도 부여잡으려 한다. 찰리 파커가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등과 연주한 아찔한 ‘Anthropology’. 어디로 가려했을까. 그의 별명처럼 새가 되었을 테니 날아올랐겠지. 그는 끝까지 가려했던 것 같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 재즈 맨들이 활약하던 시기는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나 대실 해밋(1894~1961)의 하드 보일드 범죄이 인기를 얻을 때이다. 금주법의 시대(1919~1933), 광란의 시대, 재즈 시대, 잃어버린 시대라고 불리던 때이다. 대공항 시절이니 한탕하려는 불온한 세력이 더 극성이었겠지. 불법이 창궐했다. 갱단 그리고 부패와 결탁한 인물들이 함부로 세를 불리려 했다. 사람들은 극적인 반전과 정의를 원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부정과 불합리다.      


20세기 초 미국은 자유방임 지대이다. 생산성이 극도로 증가하면서 물질적, 기술적으로 성장한다. 또 도시가 커지면서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돈이 생명력을 얻고 제스스로 판단하는 시대가 다. 헨리 조지는 이미 1879년 ‘진보와 빈곤’에서 ‘사회가 어떤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서 생겨나는 사회적 어려움은 그 사회의 국지적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진보 그 자체에서 생겨난다.’고 말했다. 물질이 커지면 그 외 다른 것들이 축소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위축되고 인간성은 상실된다.      


하드보일드라는 말은 현실을 냉혹하게 묘사하는 자연주의적 문학 기법을 일컫는다. 작가는 사태를 무감동하게 바라보고 비인간적으로 묘사한다. 살인이나 폭력이 미화되기도 한다. 건조한 문체는 도덕적 판단을 배제한 채로 사실만 기록한다. 기댈 것도 없고, 바랄 일도 없는 사람은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폭력과 부조리가 만연한 곳의 인물들은 감정을 배제한다.      


‘말타의 매’(1941)는 존 휴스턴의 감독 데뷔작으로 대실 해밋의 동명의 소설(1930)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에서는 험프리 보가트가 탐정 샘 스페이드출연했다. 스페이드는 이성적이고 직업에 충실한 인물로 인간미를 찾기 어렵다. 직업상 만나는 자들이 모두 악당이기 때문일 테지. 등장인물은 모두 말타의 매라는 보물에 눈먼 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브리지드. 그녀는 보물에 엮인 자들을 이용하고 착취해 최종 승리자가 되고 싶다. 필름 누아르에서도 드물게 강한 팜 파탈이다. 스페이드는 어느새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살인마에 밀매상, 사기꾼에 이중 스파이다. 스페이드는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애원하는 여자를 경찰에 넘긴다.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인정사정없는 냉혈한임에 틀림없다. 예전 터프가이라면 무슨 짓을 하든 여자를 구해냈겠지만 이 시대의 남자는 그렇지 않다. 커리어에 지장을 준다면 사랑이건, 우정이건 거부한다. 자기 한 몸 먹고살기도 바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1953)은 필립 말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이 작가의 작품 중 최고라고 한다. 대실 해밋의 인물도 그렇지만 챈들러의 말로는 하드 보일드 탐정의 전형으로 불릴 만하다. 험한 세태에 능통해 이미 닳고 닳은 사람들이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본다. 말로는 멋지다. 드문 사람이다. 돈도, 여자도, 귄력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지독한 자본주의 세상에서도 그는 의연하다. 오래전 어떤 어설픈 감상들이 이미 그를 뚫고 지나갔겠지.


이런 말로가 이 작품에서는 조금 다르다. 나이 먹은 말로, '싸구려 감상'에 빠진 걸까? 사람을 좀 믿어본다. 그렇지만 또 한 차례 상처를 입게 된다. 소설은 브로맨스로 출발했지만 염세적인 세계관을 확인하며 끝난다. 그는 레녹스라는 인물 덕분에 또 한 번 큰 경험을 한다. 남자와 여자, 질투, 정열, 배신, 사랑과 증오가 소설에 녹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감정들만 들끓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사회 문제, 전쟁, 운명이 녹아 있다.  세상을 주무르는 돈과 언론은 추악하다. 챈들러가 기자로서 일하며 생각했던 정의, 공정 등을 작품 속에 담았다.


탐정 말로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힘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사건 속 인간들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사람에게 정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는다. 충분히 외롭다. 레녹스와 말로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느낀다.


레녹스는 위장과 분장으로 거칠고 피곤한 삶을 이어간다. 미국, 영국, 캐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멕시코에서도 외로웠던 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이지. 이제  남은 건 연극뿐이니까.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이 속에.'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전에는 뭔가 있었어. 말로, 오래전에는 있었지,.....’        







이런 탐정 소설류나 필름 누아르 영화들이 무작정 검은 세상을 그린 건 아니다. 레녹스의 중얼거림처럼  오래전 이야기 속에서 순수하고 순진한 면을 찾고 싶은 건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은 로버트 알트만에 의해 네오느와르 풍으로 영화화(1973)되었다. 알트만 감독도 괜찮은 안티히어로 하나쯤은 부여잡고 싶었을 것같다. 존 윌리암스의 음악이 말로와 레녹스의 고독한 마음을 위로한다.

     

말로가 빅터주점에서 김렛을 홀짝거릴 때도 음악이 흘렀겠지. 이 시대 재즈에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격렬한 스윙과 하드밥의 세계. 아무리 비정한 거리를 살아도 사람은 차가운 시선만을 가질 수는 없다. 오히려 손을 델 것만 같은 뜨거운 열정이 흐른다. 반작용이겠. 냉혹하고 쓸쓸한 곳에서도 음악은 빛난다.      


구식 인테리어에 오래된 노래만 틀어주는 카페가 있다. 문을 열자 엘피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음색을 만났다.  한 잔, 음악 한 곡에 위로가 몰려온다. 예전에는 곡 스타일에 따라 좋고 싫은 것뚜렷했는데 이제는 어떤 특정한 시절에 나온 곡이면 가리지 않는다. 무언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으니까. 특히 어린 시절에 들었던 노래는 향수를 불러일으킨. 요즘 십 대도 어느 나이에 이르면 지금 듣는 음악을 그리워하겠지. 21세기 후반의 일이라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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