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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Feb 16. 2022

자기 엿보기

지난 여름 마리앙바드에서, 엿보는 자


히치콕의 '이창'(1954)에서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웃집을 들여다보며 소일한다. 그는 다리를 다쳐 재택 치료 중이다. 꼼짝없이 묶여 하루하루가 무료한 이 사람은 건너편 아파트 거주민들을 넘겨다본다. 주인공의 직업은 사진작가. 그러니 더 잘 됐다. 그는 쌍안경과 망원렌즈로 남의 사생활이나 비밀도 잘 알게 된다. 물론 자신은 보이고 싶지 않다.

훔쳐보기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 중 하나라고 한다. 김홍도의 풍속화들인 ‘빨래터’, ‘씨름’에 등장하는 양반들도 타인을 훔쳐본다. 물론 자신은 부채로 가린 채. 그들은 반쯤 벗은 여자들, 저잣거리의 놀이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남이 궁금하다. 적당히 보는 건 서로의 안녕을 위해서도 권할 만하다. 삶은 변화의 연속이고 그 변화는 대부분 타인과의 직간접 대면에서 온다. 그러나 예의 바른 이들이라면 남을 뚫어져라 바라보지 않는다. 지나친 관심도 갖않는다.


훔쳐보기가 병적으로 진행된 경우를 관음증이라고 한다. 관음증이라는 낱말은 그 자체로 파생되는 이미지 탓인지 상당히 기분 나쁜 어감이다. 관음증 대상이 되었다는 걸 안다면 기분이 나쁘다 못해 불행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정신이 취약해 이런 병에 걸린 이들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울하면서도 미심쩍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도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한국어 번역본은 ‘엿보는 자’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프랑스 소설의 원제는 Le Voyeur(1955), 영어로는 The Voyeur, '몰래 보는 이'이다. 그의 관음증 대상은 누구일까. 죽은 소녀일까. 어쩌면 자기 마음인지도 모른다. 치부를 감추고 싶은 그 마음. 우리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주인공 마티아스는 평범한 외판원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변태성욕이 있는 살인자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끝없는 변명을 지어내는 주인공 본인이나 알 테지.

예전에 ‘지난 여름 마리 앙바드에서’(1961)라는 누벨 바그 시절의 흑백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알랭 레네의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쓴 이가 바로 알랭 로보그브예이다. 뛰어난 외모의 남녀들이 모였다. 그들의 옷차림은 기괴하리만큼 세련되고 행동은 자로 잰 듯 명료하다. 차가운 천국의 모습이다. 이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여자에게 지난 여름 마리앙바드에서 만났다고 주장한다. 여자는 아니라고 한다. 자주 졸다 보니 영화 흐름을 제대로 좇지 못하는 건가. 애써 바라보자니 타블로 기법으로 조역들이 갑자기 멈추는 일이 잦다. 주연들이 자신의 기억을 반복해서 보여주때문이다. 그동안 타인들은 얼음 땡으로 굳어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이 프랑스 바로크의 특징인 기하학적 좌우 대칭, 충실한 황금 비율에 맞추어 지어진 건물과 정원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이렇게 정확한 비례를 갖춘 인공물에 비해 세상은 난장판이나 마찬가지다. 무엇하나 바르지 않다. 명백하지도 않다. 그들은 지난여름 마리앙바드에서 만났을까. 어떤 관계였을까. 끝까지 모른다. 영화가 사실보다는 그림자, 이미지, 기억의 혼란과 거부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엿보는 자’의 마티아스는 시계 외판원이다. 그는 작은 섬에 도착한다. 선착장부터 섬의 반대 방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시계를 살만한 집을 골라 판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꼼꼼하게 생각한다. 섬에는 6시간 15분 머문다. 배는 주 2회만 운항하므로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그에게는 89개의 시계가 있다. 375분을 89개로 나누면 개당 4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거주민이라야 2천 명 남짓이니 네 가구당 한 개 정도 팔아야 한다. 그는 뭐든지 궁리하고 계산한다. 그의 머릿속은 바쁘다.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마티아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빌린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 내에 시계를 다 팔겠다는 그의 희망은 속절없이 사라진다. 그는 성과 없이 이집저집을 두드린다. 그러나 11시 30분에서 12시 30분까지 약 1시간이 빈다. 적어도 마티아스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빈 시간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노심초사 한다. 자전거까지 망가져 배 출발 시간까지 놓쳤다. 남자는 섬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다음날 아침, 자클린이라는 13살짜리 소녀가 낭떠러지 아래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아이는 전날 낮 11시 이후에도 목격된 정황이 있다. 그녀는 살해되었을까, 실수로 떨어진 걸까.

다음 날, 마티아스는 낭떠러지 부근을 서성인다. 담배꽁초를 줍고 사탕 봉지도 줍는다. 그의 주머니에도 같은 종류의 담배와 사탕이 들어있다. 그는 이제 자신을 위한 매서운 형사가 된다. 사라진 빈 시간을 채우려면 생각을 짜내야 한다. 분 단위로 촘촘하게 자기 행위를 수정한다. 그 전날 들른 집들의 시간을 조금씩 뒤로 늘려본다.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자전거를 돌보는데 보낸 시간도 연장해본다. 자클린이 있던 장소를 지나지 않았다면 다른 길로 갈 때 걸리는 시간도 정확하게 재두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반복되어 다시 기술된다. 비어 있던 한 시간이 차츰차츰 채워진다. 이제 그의 시간은 가득 찬다. 완벽한 알리바이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거짓으로 꾸민 하루의 이야기를 끝냈다. 더는 어떤 수정도 없다. 어떤 허점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침 수첩에 ‘잘 잤음’이라고 쓴다.

독자는 그가 한 일을 짐작만 한다. 그는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비어있는 한 시간 동안 흉측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에는 그 일을 없애기 위해 범행 장소로 다시 가 모든 일을 복기하고 지웠을 것이다. 소름 끼치도록 뻔뻔하고 음울한 녀석이다. 그의 취향, 분위기, 수집품 등을 미뤄볼 때 제정신이 아닌 자다.

아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 시간에 자클린이 죽은 곳을 지났고 때마침 자전거가 고장 났다. 들르는 곳마다 집주인이 없어서 알리바이를 증명할 이도 없다. 누가 남자에게 혐의를 두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는 죄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의심받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속 허점을 고친다.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관음증 환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자신을 노골적으로 들여다본다. 드문 편집증에 노이로제 환자이다.

마티아스는 단순한 여행자인가, 아니면 소아 성애 살인마인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미스터리하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의 감시자가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증거를 대고 증명을 하기 위해서 초단위, 분단위로 행위를 분절해 의미를 부여한다. 몇 시 몇 분 몇 초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하등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답이 나와야 한다.

‘엿보는 자’와 ‘지난여름 마리 앙바드는 기하학적 정확성, 치밀성과는 상당히 어긋나는 인간 행동을 보여준다. 영화는 건물, 미장센, 옷차림 등으로 궁극의 하드 에지를 배경으로 제시했다. 소설도 시간, 장소를 끝없이 탐색하고 조정하는 범죄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주목을 끈다. 인간은 어설프다. 완벽, 순수 등은 우리의 낱말이 아니다. 인간은 인위/작위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다. 좀 기울어져 있고 흠집도 있지만 그대로 인정하고 싶다. 자신이든, 누구든 감시하는 문명은 힘이 든다. 끊임없이 변명을 요구하는 사회는 괴물을 낳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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