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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Feb 20. 2022

나도 그들에게 관심 없지만

플루토크라트

닐 블롬캠프의 영화 '엘리시움'(2013)이나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1968)에는 선택된 인물들이 지구를 버리고 외계행성으로 탈출한다. 윌리엄 깁슨의 '조니 므네모닉'(1981)이나 '뉴로맨서'(1984)는 뇌를 정보 유통 구로 삼는 돈과 범죄 세계를 그린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허무맹랑하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 이런 일이 점점 현실화되는 세기다. 진짜가 가상으로, 가짜는 현실로 탈바꿈한다. 거대한 욕망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꿈꾼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쓴 ‘플루토크라트’(2012)라는 책이 인상적이었다. 부제는 ‘슈퍼리치의 등장과 그 나머지의 추락 The Rise of the New Global Super-Rich and the Fall of Everyone Else’이다. 작가는 비즈니스 저널리스트로 오래도록 슈퍼 엘리트들을 인터뷰해왔는데 ‘부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반면 ‘그 나머지’는 점점 기세를 잃어간다.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그리스어로 부(富)를 의미하는 ‘plutos’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로 이뤄진 합성어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부유층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집단임에 분명하다.

20세기 초, 1퍼센트 부호였던 카네기가 자본주의 체제 내 극심한 빈부 격차에 대한 논평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를 회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 변화가 개인들에게 때로는 가혹하겠지만 그래도 모든 영역에서 적자생존을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은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선택이다.’ 생태계 현상을 당연하다는 듯 인간 사회에도 적용하는 부자의 상황인식에 아연실색한다. 한 인도 사업가는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자 전원 해고, 기계로 대체했다. 근로자들은 돈에 패배했다. 아예 노동 현장에서 사라졌으니까. 이 부자들은 보통 사람들을 자신들 삶을 위한 부수물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2011년 기준, 순자산 가치가 100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이 전 세계의 0.5%, 2,960만 명이라고 한다. 반면 5천만 달러 이상 초고액 순자산 보유자는 8만 4,700명이다. 천문학적 재산은 그저 가상현실로 느껴진다.


플루토크라트는 세계적인 부호들과 동질감, 국경을 뛰어넘는 유대감을 갖는다. 자기 나라의 일반 동포들과는 잘 통하지 않는다. 인간 문명이 누릴 수 있는 최대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공유하기 어렵다. ‘지역’이 아닌 ‘관심사’가 중요한 거니까. 부유한 서구인은 같은 동네 사람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계층의 아프리아카인, 러시아인, 중국인과 더 잘 통한다. 이들은 스스로 세계 시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구 어딘가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즉시 관심을 갖는다. 무역이나 자본의 세계화가 아닌 인재의 세계화가 열린 셈이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MBA를 받은 졸업생에게 모교는 국적보다 더 중요한 정체성을 심어준다.

국부론(1776)의 애덤 스미스는 토지 부자는 부동산이 있는 국가에서 살아야 하지만 주식을 소유한 이들은 세계 시민으로서 특정 국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혜안을 가졌다.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성채도, 작위도 없다. 그렀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인너 서클 대원으로서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포럼이나 비밀 회합에 참여하면서 얻는 우월감이 있다고 한다.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 유럽과 북미의 빌더베르크, 중국 하이난의 보아오 포럼, 뮌헨의 DLD, 구글의 자이트가이스트 콘퍼런스 등이 그 보기다. 참여자는 자천타천 ‘특별한 사람들’이다.

과거와 달리 플루토크라트들의 상층 피라미드는 상속받은 자본의 게으른 소유자들만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진지하게 일하는 부자다. ‘평생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소비만이 아닌 창조하는 능력가인 셈이다. 특히 새로 슈퍼리치 대열에 진입한 부자들은 ‘엄격한 교육을 받은 수학자에다 젊어서 자수성가한 중산층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엄청나게 일하고 엄청나게 번다. 잔인한 효율성의 제왕들이다. 이래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비웃을 수조차 없다. 그들은 과거 귀족들처럼 지대와 임대로 거저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 노력, 운 등을 경시할 수도 없다. 공정한 게임 결과로 승자가 되었다고 말할 테니.

이들은 재정, 정보, 복지, 치료제, 교육 등의 정책 방향에 전방위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자신들의 비즈니스적 이해관계, 이데올로기에 따라 관련 있는 국가의 산업, 환경, 법률, 정책이 요동친다. 사람들의 사고에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빌 게이츠 프로그램에서 풍족한 자금 지원을 받는 이들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단체의 동료들에게 회의감을 다. 박애 자본주의자들의 자선이 그 외 사람들의 이타적 행위를 재고하게 한다.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는 99퍼센트와 1퍼센트라는 정치적 선을 그었다. 월가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고학력자들이다. 그들은 상층 집행부에 분노했다. 일반인들이 볼 때는 엘리트가 슈퍼 엘리트에게 항의한 사건이다. 실제로 1% 내에서도 상위 0.1%는 나머지 0.9%와 매우 다르다고 한다. 문화적, 경제적, 국가적 논의마저 바꿀 정도로 다르다. 1% 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깊은 무력감과 박탈감에 빠진다. 부자 집단 내에서도 상층을 따라잡기에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 백만장자는 억만장자를 부러워한다.

슈퍼리치 내부에도 가 있고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질투와 부러움, 증오가 존재한다.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가팔라지는 상승곡선 때문에 불평등이 더욱 심해진다. ‘행복한 농부와 불행한 백만장자‘란 이런 데서 나온 말이다. 어떤 점에서 부자일수록 불행하다는 뜻이다. 자기보다 더 부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행복감이 다. 반면 더 높은 유동성과 기회를 가진 부유한 사람들일수록 행복을 덜 느낀다. 그들은 다양한 상황에 심한 좌절감을 드러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보다 터무니없이 잘 살 때, 앞으로도 도무지 따라잡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 때 그런 불만을 품는다. 그래서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은 성공한 중산층이라는 말도 있다.


세상에는 비교할 일이 참 많다. 한병철의 '피로사회'(2010)를 읽어보면 현대사회에서 으뜸가는 추동력은 본인이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담금질하고 명령해서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다. 개인적 이상 추구를 위해서 혹은 사회에서 바라는 이가 되고 싶어서이다. 열심히 살다 보면 늘 피로에 젖는다. 누구하고든 경쟁은 끝이 없다. 그런 점에서 플루토크라트들은 비교 자체를 거부한다. 열외인 거다.


웬만하면 신경 안 쓰고 살면 좋을 텐데 그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플루토클라트가 세상의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게 굵고 센 줄로 잡아당긴다. '그 나머지'는 그들이 이끌고 잡아당기는 곳으로 끌려가야 한다. 이게 문제다. 그것만 아니면 무슨 상관이랴.


구글의 기업 정신은 'Don't Be Evil'이다.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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