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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Mar 08. 2022

소멸 충동

장 폴 뒤부아의 '상속', 멜랑콜리아


뒤숭숭한 소설, 장 폴 뒤부아의 ‘상속’(2016). 결국 폴은 자살했다.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외삼촌이 간 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유전자를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세로토닌 결핍이든, 코르티솔 과잉이든. 자살 유전자도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와글거리던 애벌레들도 종료되었다. 소설은 인간 본능의 어느 부분에서는 소멸에의 충동을 격렬하게 감지한다고 말한다.

태초에 어떤 유전자 풀이 있었다. 유전자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살아남으려 한다. 그들의 운반자는 멋모르고 왔다가 조용히 돌아갔다. 진 gene만이 승리자이다.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유전자+환경요인의 결과물이다. ‘자기’라고 할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자살 유전자를 지닌 집안으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가족이 있다. 이 가문에는 철분 대사이상이라는 유전병이 있다. 대사이상 장애로 인한 우울증은 유전될 수 있다고 한다. 유명 모델이었던 그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1954~1996)도 같은 이유로 죽었을지 모르겠다. 남자다움의 표상, 마초적 외모와 취향을 지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보통 총기 사고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조부와 부친, 형제들도 자살했다고 하니 유서를 남기지 않았어도 자살을 추측하게 한다.

폴은 의사다. 조부, 부친이 모두 의사였고 자신도 자연스럽게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가족 요인, 실연, 직업적 실패 등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폴의 조부는 러시아인으로 스탈린 주치의였다. 조부는 스탈린 부검 중 뇌 한 조각을 훔쳐 나온 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의술은 독재자는 보살폈지만 희귀종 동물 하나 구하지 못할 만큼 무능하다. 독재자의 주치의는 더 이상 사람을 살리는 직무와 관계없이 살다가 자살했다.

폴의 어머니와 그녀의 남동생은 심상치 않은 관계다. 둘은 같이 일했고 같이 쉬었다. 먼저 동생이 위장된 사고로 자살했고 누나는 곧이어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해 죽었다. 둘은 나란히 묻혔다.

아버지 아드리앙은 이미 부친, 아내, 처남의 자살을 겪은 터다. 가족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졌다. 그는 작은 도시에서 개업의로 일해왔다. 대형 병원 의사로 낯선 환자들을 만나는 체험과는 다르다. 소도시에서 대를 이어 찾아오는 환자들은 평소에는 교제 대상에 속하는 이웃이다. 부모, 형제를 서로 알고 어린 시절을 공유한다. 이들에게 불치병이나 죽음을 선고하는 건 고통스러울 터이다.

아드리앙은 30년간 14명의 환자를 안락사시켰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이 간절히 부탁해왔다. 그는 삶을 죽음의 상태로 바꾸었다. 이런 비밀을 지닌 채 평범한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그는 불치병 환자들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신경 마취제와 근육 마비제와 같은 독극물을 주입했다. 그러나 때로는 죽어가는 환자들이 보인 원망의 눈빛을 잊기 어렵다.

그는 아내가 죽은 날도 변함없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비범한 진리를 애써 실천했다. 송아지 간이었다. 태어난 자는 살아야 한다는 진리. 만일 이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 사라져야 한다. 아드리앙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도록 자기 턱을 테이프로 꽁꽁 싸맨 채 빌딩에서 떨어지는 추락사를 택했다.


이런 가족력을 물려받은 한 남자. 의사, 운동선수. 그도 그 유전자에 굴복한다. 그가 만일 사랑에 빠졌더라면 좀 나았을까. 그가 사랑한 26세 연상의 노르웨이 여자는 치매를 앓아 폴도 알아보지 못하는 채로 요양원에서 죽어간다. 자살 아니면 유폐.

폴은 아버지의 후임 의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15,16,17번 환자의 죽음을 도운 후, 18번으로 자신을 택했다. 뇌 속 애벌레에 점령당한 집안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애벌레들은 어딘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다가 다른 숙주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 그게 두렵다. 소멸에의 유혹은 깊고 진하니까.

프랑스 사람들도 이렇게 유전자를 확고하게 믿는구나. 선택보다는 운명. 주어진 것, 그것의 괴력을 확신하는구나. 같은 나라 샤르트르의 선택/행위/참여를 생각하다 보니 장 폴 뒤부아라는 작가가 특이해 보인다. 유전자를 향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삶’이라니. 얼마나 운명론적인가.

해묵은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 씨실인가, 날실인가. 우리가 아무리 가로실을 짜고 또 짜도 운명의 여신이 점지하고 있는 그 길, 세로줄을 헤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점쟁이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개인 각자는 책임을 다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건네주느라 분주하다.

장 폴 뒤부아의 세상은 비관적이다. 소설 속 폴의 조부가 들려주었던 두 가지 이야기는 인간애의 의지를 무너뜨린다. 하나, 콰가라는 얼룩말 비슷한 희귀종 이야기. 콰가는 인간이 남획하고 전멸시켰다. 마지막 한 마리가 ‘자연은 예술의 스승’이라는 동물원에 잡혀왔다. 이 동물에게는 기후도 음식도 맞지 않는 곳이다. 콰가를 구경거리로만 생각하는 동물원 관리자들은 콰가의 최후를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 그리스 목동 스피리돈 이야기. 그는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자다. 그런데 일등이라는 점이 수상하다. 마라톤 경기장 일대 지리를 훤히 알고 있는 이 남자가 샛길과 지름길, 건초 운반 수레를 이용해 우승을 한 건 아닌가. 만일 이런 의심이 맞는다면 올림픽은 처음부터 거짓말의, 거짓말에 의해, 거짓말을 위한 쇼쇼쇼. 인간에게는 치료약도 구제책도 없다는 것. 장 폴 뒤부아는 여러 소설에서 자기 이름 ‘폴’을 반복 사용해왔다. 이 주인공들은 자살하거나 패배한다.

작가가 주인공을 과격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살 예찬론자인가, 아니면 인간 혐오자인가. 작가는 인간 문명에 지독하게 좌절한다. 고칠 수도 없는 중증 환자들로 여긴다. 그는 치료 불가 판정을 내렸다. 소설은 일종의 문명 비판 내지 경고로 보인다. 차라리 이 세상은 다시 쓰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읽힌다.


‘멜랑콜리아’(2011)라는 영화가 있었다. 지구 최후를 그린 라스 폰 트리에의 아름답고도 우울한 서사시이다. 여주인공 커스틴 던스트는 ‘지구는 사악하다’고 믿는다. 그곳의 생명체가 악하므로 지구는 사라져도 마땅하다고, 애석해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환멸과 무기력이 넘실거린다. 모두들 안녕하지 않다.

유전자는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해왔다. 그들의 집합체인 개인/가족/사회/국가는 더 큰 욕망을 배타적으로 실행한다. 이제는 잉여 욕망이 지상을 채운다. 누구든 문명에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이 작가들은 인물의 자기 파괴를 통해 세상에 경고음을 울리려 한다. 그들은 지구를,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 어린 사랑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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