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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Feb 28. 2022

시시할까 봐 두려워

폭스 캐처, 모멸감


YOLO, 인생은 한 번 You Only Live Once 유일무이하므로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세상에서도 강요하고 스스로에게도 암시한다. 사는 동안 뭔가 한 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남에게 시시해 보일 거라고 자평한다면 서글픈 일이다. 남이 시시하게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남들의 편견이니 뭐라고 충고할 수도 없고 생각을 바꾸게 할 재간도 없다.

반면 신을 스스로 하찮게 생각한다면 매사 형편없이 구겨진다. 남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라도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고 자아존중감이 다면 안심이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는 괜찮아도 본인은 스스로를 하찮게 생각하는 이도 많을 테다.

김찬호의 ‘모멸감’(2014), 부제는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이다. 누군가 모욕을 주면 모멸감을 느끼기 쉽다. 상대가 나를 무시하면 체면이 안 서면서 수치심이 발동한다. 굴욕을 강요하고 한 사람의 부끄러운 점을 들추어내는 행위는 참기 어려운 심리적 학대나 다름없다. 한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멸감은 매우 주관적인 감정이다. 상대가 어떤 의도였는지 관계없이 본인이 느끼는 정도가 달라진다.

결핍을 많이 느낄수록 모멸감을 갖기 쉽다. 세상에는 비교할 거리 투성이다. 재산, 외모, 학벌 등. 이런 것만 생각하다 보면 땅만 바라보아야 한다. 나보다 괜찮은 누군가는 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할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자긍심이 높을 것 같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모멸감이나 분노에 젖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보여도 알고 보면 의외로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려 다.

부유층의 일탈을 다룬 영화를 몇 편 보았다.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저들은 행복을 거머 줬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렇지 않나 보다. 호화로운 삶도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일상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가난하다. 폴 게티의 절대 고독에 조금은 공감했던 ‘올 더 마니’(2017), 베이클랜드 집안의 괴이한 모자 관계를 그린 ‘세비지 그레이스’(2007), 마우리치오 구찌 살인사건을 다룬 ‘하우스 오브 구찌’(2022)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베넷 밀러의 ‘폭스 캐처’(2014)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부자 이야기였다.

'폭스 캐처'의 주인공은 존 듀폰(1938~2010)이다. 그는 화학그룹 듀폰의 상속자 중 하나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건 남들 생각이다. 그는 성격장애, 마약 복용, 고성능 무기 수집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으며 총기 위협으로 인한 이혼도 겪었다. 모친이 사망한 후에는 다이너마이트로 거위를 죽이고 링컨 컨티넨탈을 수영장에 빠뜨리는가 하면 경장갑차를 자기 사유지에서 몰고 다니는 기행도 지질렀다.

한 사람의 속마음은 모른다. 단지 영화 속에 묘사된 주인공으로만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리처드 3세가 실제로도 그렇게 잔인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한 그 남자를 안다. 사실과는 좀 다른 인물, 작품 속의 등장인물로서만 안다. 실제로 존 듀폰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영화를 보고 추측만 할 수 있다.

영화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무게감을 갖추고 있었다. 물이 목까지 차오른 곳을 걷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관계가 이렇게 무겁고 어려운 일이구나. 존 듀폰은 애정이 그립다. 쉰 살도 넘은 남자가 사랑, 그것도 엄마에 대한 갈망이 저렇게 절실하다니. 그는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귄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친구도 돈을 주고 샀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남들과 수평 관계를 맺는 일이 어려울 것 같긴 하다. 그 사람 본인보다는 돈/힘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가 뭔가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섰다.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사회에도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듀폰은 국가대표급 레슬러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 이름난 레슬러들이 모였다. 선수들은 돈도, 훈련 장소도 필요하다. 막강 ‘폭스 캐처’ 팀이 만들어졌다.

엄마에게 인정받으려면 선수들을 제대로 훈련시켜 메달을 받게 해야 한다. 모친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 그게 그의 동기이다. 물론 모친은 레슬링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존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미성숙한 아들에 냉정한 엄마다.








데이브와 마크 형제는 각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다. 그러나 존 듀폰이야말로 폭스 캐처의 절대지존이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져야 했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룰이었다. 그러나 팀은 존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역량도 채 보여주지 못한 채 모친도 사망했다. 힘을 다해 훈련하고 성과를 보여주길 원했던 존은 낙담하고 좌절하다 데이브를 찾아가 총기로 살해한다.

왜 죽였을까. 존에 대한 마크의 애정이 형 데이브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룰을 제때 따라주지 않는 데이브에게 모욕을 느꼈을까. 그는 자기 팀에서만큼은 무한한 사랑도 인정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스폰서이자 애호가이지 선수도, 코치도 아니다. 전문영역 선수들이 자기 뜻대로 될 리 만무다.

그런 부자도 자존심이 상했을 수 있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듀폰은 그렇게 여겼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구체적인 상대가 없어도 모욕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한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기준에 미달한다고 여기면 자기 스스로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러나 듀폰 같은 사람은 감정의 사회학 따위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누가 그를 대놓고 모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또 자신을 남과 비교해 가며 수치를 느낄 일도 별로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순백의 유치 찬란함으로 감싸인 이 남자감정의 작은 손상도 참아낼 수가 없다. 방어벽이 거의 없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레슬러들에게 놀란다. 시시해 보이는 건 두렵다. 모멸감을 느낀다. 유리 멘털. 그는 '여우 사냥꾼'이 아닌 '포획된 여우'에 불과했다.

감정의 방패는 좀 두꺼우면 좋겠다. 웬만한 모욕은 귓등으로도 듣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통 큰 베짱이나 무심함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존 듀폰보다 낫다. 그는 살인자로 기소되어 교도소 복역 중 죽었다. 그 많은 재산도 소용없었다.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만 있는 경우도 있다. 자기 존중은 부족한데 남으로부터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빗댄 말이다. 스스로 시시하게 여기는데 타인이 나를 대단하게 여기기는 어렵다.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소한 일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이야말로 자기를 존중하는 이들이다. 다른 이들과 동등하다는 자긍심, 자기 스스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긍지가 필요하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보다는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늘 자신은 피해자라는 인식,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업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났다. 세월이 흐를수록 피해자 연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생각이 . 대부분 손해를 본다면 이익을 보는 이들도 있을까? 아마 드물 것이다. 모두 피해자가 되길 자처하니까.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는 공자 말씀이 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남에게도 하지 말라'. 좋은 삶을 위한 예방이자 치료제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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