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책을 읽다가 수렴되는 것이 비슷할 때면 놀란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하던 것들을 졸라의 ‘작품’에서 재회할 때 반가우면서도 쓸쓸했다. 사람들은 어떤 갈망과 프로세스를 거쳐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달음이 명랑하고 화창한 것이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반대일 때가 많다.
파우스트 박사는 지식이 구원과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그는 세상의 지식을 섭렵했고 통달했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는 않다. 오히려 깊은 우울에 빠져 있다. 이 책의 주제와도 통하는 ‘노력하는 자는 헤맨다’를 증명한다. 시도하지 않는 자는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건가.
끝없이 추구하는 자가 이르는 건 고작 패배나 죽음이다. 자연은 인간의 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에리직톤은 두려움이 없다. 그는 여신이 금하는 거대한 나무를 베고 대신 갈구병을 얻었다. 끝없이 먹어야 한다. 그렇게 먹어대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멈출 수 없다. 허기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드디어 자신까지 먹는다. 그 먹어대는 입만 두고 다 삼켜버렸다.
에밀 졸라의 ‘작품’(1886)에 등장하는 클로드는 세잔+마네+모네 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잔의 지분이 가장 높다.클로드는 에리직톤과 닮았다. 자연과 경쟁하기로 한 사람이다. 예술이 삶의 동기다. 보는 것, 느끼는 것은 모두 그의 회화 세계에 구현되어야 한다. 그를 만족시키는 작품은 없다. 그려보아야 그가 원하는 진짜와는 달리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작품들은 태어나자마자 경멸을 받는 모욕의 대상이 된다. 작가에 의해, 창조자에 의해.
클로드가 죽음을 불사하고 해내려는 건 그만의 순수 표현이다. 주인공은 그걸 위해 태어났고 또 죽기까지 한다. 무언가를 위해 평생을 바치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본인에게만은 희열을 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 프랑스의 주류 예술계는 관제 아카데미 휘하에 있었다. 유명 작가들은 고전적이거나 사실적인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화가로서 입상하려면 선이나 형상에 치중해야 한다. 주제는 배경과 명료하게 구별되었다. 클로드는 넓게 보아사실화풍 작가다. 그러나 이 ‘사실’이라는 게 문제다. 어디까지 ‘사실’일까. 야외에서 몸으로 만난 사물은 즉각적이며 감각적이다.간접적, 인공적 혹은 개념적이지 않다. 19세기의 사실화는 광학에 자극받는다. 빛은 표면을 부수고 형태를 갉아먹는다. 배경과 주제는 혼돈으로 마감되어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물은 존재할 이유도 없이 흩뿌려진 물감 덩어리 인상으로 남는다. 클로드에게는 인상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견디기 어렵다. 우리 존재가 그렇게 하찮다니. 햇살 아래 폭파된 채 산산조각 나 버린다. 경계를 긋자.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 또렷해야 한다. 형상이 액체나 기체처럼 흩어지는 건 두렵다.
클로드가 최후로 선택한 길은 상징이다. 자신이 현실, 과학 만능의 길을 열어 놓았으나 그 길이 가는 방향은 존재 부정이요, 허무이다. 노력해서 이른 길이 허공이다. 이 예술가는 딛고 일어서려 한다. 어둠에 삼켜지기를 거부한다. 제3의 길, 사실 모사보다는 은유, 상징으로의 길을 걸어 보자.
그러나 그길은 지금껏 걸어간 곳과 반대 방향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길이다. 광기에 빠진 남자는 자살로 최후의 반격을 가한다.
예술 경향은 오랫동안 현실과 상징, 낭만과 사실, 과학과 신화 등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주류를 바꿔왔다. 적어도 20세기 전까지는 그렇다. 시대정신은 한동안 특정한 것에 흠뻑 빠지게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 반대편에도 눈길을 준다. 그런 식으로 힘은 반대 힘을 만나 밀고 당긴다. 선과 색이든 혹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든 어느 한쪽이 과해지면 반대쪽으로추가 넘어간다.
클로드는 ‘목로주점’에 나오는 제르베즈와 오귀스트의 아들이며 ‘나나’와는 아버지가 다른 남매다. 그는 자신의 부모 형제처럼 결함이 많다. 침울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신경증, 우울감도 심하다. 그러나 조증과 울증은 이 예술가에게 축복이자 저주이다. 조증이 심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복종시킬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는 광학 이론을 소리 높여 외쳐 외광파의 우두머리 격이 된다. 그러다가 과격하고도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드러나면 사람들과의불화로한없이 우울해진다. 클로드는 제대로 끝내는 작품도 없이 예술이라는 마성에 홀려 자살하고 만다. 아내와 아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더니 자신까지도 파멸시켰다.
에밀 졸라(1840~1902)가 간 길을 바라본다. 작품 속의 클로드, 그러니까 마네+모네+세잔처럼 그도 현실을 잡으려 했다. 졸라는 인간을 들여다본다. 유전과 환경의 합작품이다. 재료를 넣고 잘 버무려보면 물리적, 화학적 변화로 무언가가 생성된다. 그 ‘무언가’는 자기 힘으로는 만들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유전자 전달자들에게서 받은 그 DNA와 환경을 적당히 섞어 살다가 자식이라는 새 유전자를 만들고 사라지는 것이다. 에밀 졸라는 그런 피조물을 그리려 했다. 가련한 피조물들의 피고 지는 세월을. 그것이 루공-마카르 총서다. 에밀 졸라는 소설 속 인물들을 자주 비극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차가운 과학만이 답일 리는 없다. 인간에게는 상상하는 힘이 있다.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를 뛰어넘을 날개를 품고 있으니까. 작품 속 클로드가 인상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상징주의로 나아가려 한 점이 그 반증이다.
후대의 우리는 인상주의를 슬프게만 기억하는 건 아니다. 인간다운 감성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예술 세계로도기념한다. 순간이지만 찬란함 같은 것. 필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꽃 핀 처녀들의 그늘’을 읽어보면 외젠 카리에르, 클로드 모네, 제임스 맥닐 휘슬러 등의 인상주의와 초기 추상 작품들을 인용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사라질 듯 아련한 묘사에 매우감탄한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사물이나 현상은 실재가 아닌 개념이다. 인식이 명령한 것이다. 일단 받아들여진 개념은 실제 대상과는 관계없이 고정된다. 그러므로 현상을 제대로 보려면 원상태로 환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클로드의 작업은 여기까지 아니었을까 한다. 그다음에는 후배들이 이어받는다. 확대하다가 축소하고 수정도 할 테지. 그러나 그는 선을 넘는다.지나치게 열심히 신다.
다시 파우스트로 가자. '노력하는 인간은 헤맨다', 맞는 말인 듯싶다. 위대한 작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그렇다고 말한다. 주인공들은 노력하고 시도하고 끝없이 유랑한다. 갈 곳을 모르는 불안한 그림자들이다. 인물들은 시작할 때 또렷한 길을 따라 걷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길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는 걸 깨닫는다. 대부분은 그 길이 지워진 상태에 서게 된다. 그리고 헤맨다. 어디로 갈지 몰라 사방팔방 쳐다본다.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나오는 스티어포스는 어두운 음성으로 말한다. ‘아무도 나를 끌어줄이가 없다, 지시하는 손가락이 없다’고. 그러나 지워진 길에 선 이들도 최선을 다한다.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적극적/명랑한 허무주의인 셈이다.클로드는 자신이 갈 길을 제 스스로 가리킨다. 외로운 길을 걷는 자, 그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