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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Mar 28. 2022

토박이 외국인

'미국의 아들', '마이너 필링스', '벨파스트'


리처드 라이트(1908~1960)의 ‘Native Son’(1940)은 ‘토박이’ 혹은 ‘미국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반어적인 제목이다. 주인공은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이다. 당연히 미국인이다. 그러나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1930년대를 살던 흑인들은 자기들이 그 나라 사람들인지 심쩍어 했다. 들은 이미 남북전쟁, 세계대전에 참전해왔다. 그러나 국가, 사회는 의무와 책임은 강제한 반면 권리 부여에는 냉담했다.

작가는 주인공을 동정하지도 그의 편에 서지도 않는다. 캐릭터는 두렵도록 생생하다. 그래서 잔인한 흑인 부랑아, 비거는 사유의 대상이 된다. 서두 부분, 비거가 집안으로 들어온 들쥐를 때려잡는 장면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허름한 방으로 들어온 시커먼 쥐. 비거는 부들부들 떠는 가족들을 위해 쥐의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내려친다. 비거는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다. 심장에 맺힌 것이 많으면 온전히 살기 어렵다. 남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문명이 그를 쥐로 만들었다. 평화를 갉아먹는 죄인이 된다.

사람들은 구체적 이유를 들어 한 사람의 성격 형성과 운명을 결과론적으로 입증하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점을 부정한다. 자잘한 사건보다는 사회구조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고 또 파괴한다. 산업사회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던 시대다. 인간을 착취하고 핍박하는 일이 당연시되었으니 흑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백인들의 인종 차별과 그에 관한 법 때문에 흑인들은 분리된 선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금 바깥을 구경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다. 경계를 어기고 나온다면 투명 인간이나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 투명 인간은 자신의 몸과 이름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없으니 공허나 다름없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뭔가를 잡아채려 할 때, 그는 범죄자로 전락한다.

비거는 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였다. 감히 백인 여자를,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그녀를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 사실을 아는 자기의 흑인 여자 친구도 죽였다. 살인의 이유를 몇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순간, 그의 생애, 사회, 미국의 전 역사가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 적대적이다. 죽을 때도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행위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상당히 무게감이 있는 작품이다. 예전에는 이런 책을 알지도 못했고 읽지도 않았다. 백인들의 ‘추상적 존재론’에 집중한 탓일까. 백인의 고뇌를 보편으로 알았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반면 미국 흑인들은 구체적이고 사소한 삶에서 부조리를 견디어냈다.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짜 존재론적 고뇌란 이런 거겠지. 그들은 오랜 싸움 끝에서야 남들처럼 ‘추상적 존재론’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

‘마이너 필링스’(2020)를 쓴 캐시 박 홍(1976~)은 오래도록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작가는 미국 출신이기는 했지만 한국 사람, 한국어 사용자들 안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영어와 백인을 본격적으로 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낯선 환경에 둘러싸인 소수자라는 자의식을 가진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소수자이다. 종교, 성별, 세대, 계층 등에서 자신이 점하는 위치가 빈약하거나 낮을 경우 그렇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유태인, 세르비아에 사는 보스니아인, 남편 친인척에 둘러싸인 예전 한국 여자들, 위계질서가 엄격한 직장의 신입사원, 미국 흑인이나 아메리칸 원주민은 소수자다. 이들의 난감함은 한 두 줄로 요약할 수 없다. 주류는 위압적이다. 심지어 폭력적일 때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다수이고 싶다. 숫자가 적다 해도 이념과 돈, 권력으로 무장하면 주류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주류는 지배자다. 정치, 경제, 문화, 언어 모든 분야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누가 그런 위치에서 내려가려 할까.

캐시 박 홍은 틱 증상으로 심리치료까지 받은 적이 있다. 그녀는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카타르시스 없는 감정 상태’의 원인으로 ‘소수적 감정’을 내세웠다. 소수적 감정이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경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의미한다. 겉으로는 ‘상황이 훨씬 좋아졌다’며 연합한 상태로 보여도 미국 사회는 인종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이 ‘기타’ 인종으로 분류된다는 걸 늘 의식한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을 정도다. 다른 범주라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종 특성은 명명백백하다. 어떤 백인 우월주의자의 눈은 ‘저것들이 이제 사방에 깔렸네’로 인식한다. ‘여기 아시아인 있어요?’, ‘당신은 흑인인가요?’하고 물을 필요도 없이 인종은 두드러진다. 어떤 식으로든 가리거나 감출 수 없다.

이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온 이들이라면 인종적, 언어적 소수자들의 슬픔을 공감하기 쉽지 않다. 우리도 한반도에서 만큼은 주류다. 단일민족, 배달민족의 신화를 누려왔기에 이민자들이 어떤 고통으로 당하고 있는지 일부러 알려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화 ‘미나리’(2020)에 그리 감동하지 않았고 재미 작가 이창래의 소설도 점점 낯설어진다. 그들은 다른 곳에 터를 잡았다. 디아스포라를 실천한다. 한국 이야기를 해도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 이곳은 이미 자신들이 떠난 그때 그곳이 아니다. 이민 2대, 3대로 내려가면 기억이 희미해진다.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곳도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이민자들은 새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곳에서 인정받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소수적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미나리처럼 뿌리를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캐시 박 홍은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 확장이 우리 조국의 피를 빨아 챙긴 방식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이 이민자들에게 주입하는 아메리칸 드림에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백인 위주의 유아론에 경고를 보낸다. 앞서 인용한 리처드 라이트의 ‘토박이’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토박이이지만 미국의 자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들은 해당 문명에 우호적일 수 없다.

책을 읽다보니 우리 상황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세계화 영향인지, 인구 감소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한국에도 외국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2022년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약 200만 명, 다문화가구가 35만 가구에 이른다는 보도다. 머지않아 그들로부터 ‘인종주의’니 ‘인종 트라우마’니 하는 단어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나부터도 인종을 보는 시각이 편협하지 않은가 돌아본다. 리처드 라이트나 캐시 박 홍의 미국 사회에는 비난하고 분노하면서 한국사회 문제에는 무감각하다면 센스이다. 이 작가들에게 공감한다면 우리 사회의 외지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마땅하다.

캐네스 브레너의 ‘벨파스트’(2021)는 1960년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의 천주교도인들과 개신교도들 간의 갈등을 담은 영화다. 그들은 끝내 화해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곳에서의 삶이 괴로운 한 개신교도 집안이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하는 이야기이다.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면 시야가 달라진다. 지평이 확대된다. 문제는 그 안에 사는 이들이다. 다름을 인정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인정하기 싫은 건가?

구스타프 말러는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구절의 오스트리아, 독일이 한국으로 확장되려 한다. 앞으로는 ‘다름’에 대한 유연한 시각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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