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을 위하여
황정은, 연년세세, 파씨의 입문
황정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연년세세’(2020)는 ‘여러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짐’이라는 뜻이다. 작품은 연작 같아 보이지만 한 사람만의 연대기는 아니다. 굳이 주인공을 꼽자면 가족 전체다. 엄마, 아버지, 두 딸과 아들. 여기에 그들의 횡적, 종적 인간관계가 촘촘하게 연결된다. 네 단편의 주인공은 작은딸, 큰딸, 엄마 그리고 다시 작은딸로 돌아간다. 소나타 형식처럼 대립적인 1 주제와 2 주제가 연이어 나타나고 이들의 중심에 엄마와 그 가계도가 있다. 작은딸은 돌고 돌아 세상과 화해한다. 독일 교양소설 분위기도 느껴진다.
인물들은 상처투성이다. 작가의 여리고도 강인한 면을 뚫고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작다.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본인들도 의도한다. 성장 과정부터 상처가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살얼음판을 딛듯이 조심조심 살아간다. 발밑은 늘 위험하다. 가볍고 사소해야 살아남는다.
작은딸 한세진은 미혼에 작가다. 매여 있지 않은, 매여 있지 못하는 유목민이다. 온순해 보이지만 타협하지 않는 묵직한 주관을 지녔다. 큰딸 한영진은 유부녀에 직장인이다. 그녀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가지도 못한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집에 꽁꽁 묶여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두 딸의 엄마, 순자 씨, 세상으로부터 아무렇게나 대우받았고 자긍심도 느껴보지 못한 채 늙었다. 심지어 본명인 순일이로도 불려보지 못했다. 순일이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너무 개인적이었으니까. 그녀의 삶에 개성이란 건 없었다. 주변 환경이 주는 신산함을 흡수해야 했다. 그녀는 외부만 남은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세상은 따뜻하지 않다. 이순일은 외할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조부는 자신의 감정을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세상이 고통만 주었기 때문이다. 큰딸은 전염병으로 죽고 작은딸은 가출했다. 큰사위도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큰딸이 남긴 두 손녀 중 작은 아이는 화상을 입고 죽었다.
한세진은 경험한다. 이들을 바라보고 품는다. 한국 가족만이 아니고 미국의 이모할머니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소설은 한 가족을 통해 바라본 여성 수난사. 아니, 20세기 한반도를 거쳐 간 사람들의 역사다.
이 정도 시간과 공간이라면 대하소설감이다. 100여 년의 세월이니 그럴 법하다. 이순일의 외조부, 부모, 친구, 남편, 자식들, 동생과 그 자녀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하다 보면 열 권도 부족하지 않았을까. 한 사람 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들은 큰 강물이나 다름없다. 강은 연년세세 흐른다. 그침이 없다. 소설도 길게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170여 쪽의 얄팍한 두께를 원한다. 한 사람의 생애를 줄이고 줄여 몇 줄만 남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들 각각을 좀 알게 된다. 이 작가이기에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해도 가능하다.
2010년 처음 황정은의 소설을 접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의 그림자’(2010)라는 희한한 제목이었다. 백 개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소설에는 그림자도 가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애써 눈물을 참고 있을 게 뻔하지만 그런 척도 안 한다. 인물들이 어떻게 이렇게 선할 수 있을까. 세상의 비참도 이들의 애틋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그림자도 편히 깃든다. 세상의 위선, 폭력은 이 사람들에게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천사들일까. 그래서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파씨의 입문’(2012)은 단편 모음집인데 ‘백의 그림자’처럼 쓸쓸한 등장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단편 ‘묘씨생’를 읽다보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다. 그건 한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이다. 이 가녀린 것들도 한이 많겠구나.
묘猫 씨는 고양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형제들이 죽었다. 상한 고기를 먹은 탓이다. 그러나 이 고양이는 자신만큼이나 불행한 노인이 보살피면서 살아났다. 둘은 상대에게서 서로 위안을 얻는다. 묘 씨는 노인이 죽은 후로 본격적인 길냥이가 된다. 죽을 고비도 예사로 겪는다. 고양이는 ‘이 몸에게는 나쁜 일뿐이었다. 나쁜 일뿐이었을까, 대답하겠다. 나쁜 일뿐이었다.’고 되뇐다. 죽을 정도로 걷어 차인 적도 있고 불임시술도 겪었으며 시력도 잃었다. 고양이는 지금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일생을 두려워하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들의 손에 달렸으니 목숨조차도 내 것 같지 않은 이런 세상은 두 번도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삶이 지속될까 두렵다. 노인과 길냥이에게 삶은 고통 그 그 자체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계속해보겠습니다’(2014)의 애자는 사랑으로 가득 찬 여자다. 그녀는 남편을 산재 사고로 잃었다. 아이들은 아홉 살, 열 살이다. 엄마의 손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애자는 남편에의 사랑에 전 생애를 걸다시피 했다. 그만을 사랑했고 그만이 삶의 의미였다. 그가 죽은 후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로부터 ‘아무도 사랑하지 말 것’을 암시받는다. 그렇게 하찮게 살다 갈 인생이라면 굳이 사랑하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운다. 그 아이들, 소라와 나나가 어른이 되었다. 소라는 자신을 멸종시키기로 결심한 지 오래다. 그러나 나나는 그렇지 않다. 사랑을 경계하고 결혼은 거부하지만 아이는 낳기로 한다. 두 자매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에서 자랐다. 오래도록 사람과 사랑에 회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나 뱃속의 작은 생명에 맹세한다. 계속해보기로. 살아보기로.
‘야만적인 앨리스 씨’(2013)는 읽기 힘든 소설이다. 마을 사람들, 앨리시어와 동생, 그들의 괴물 같은 부모 그리고 이들 모두를 키워낸 고모리를 참아내기 어렵다. 이곳은 무덤 같은 곳. 황무지, 공사장, 개 사육장, 하수처리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폭력, 욕설, 악다구니가 난무한다. 고모리 사람들이 이곳에 사는 이유는 단 하나. 토지 보상금, 재개발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탐욕에 대한 보고서에 다름아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또 기른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논리였다.
황정은 작가는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안다. 그녀는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직시한다. 인물들은 끝없이 추락한다 그러나 상승하고 싶다. 단편 ‘낙하하다’의 다음 글을 읽는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지만 확실히 떨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다. 떨어지는 중에 아래위가 뒤집혀 본래는 위쪽인 것을 아래쪽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올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승 상승 이거 봐 거듭 말하자 속도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낙하 낙하 낙하보다는 빠른 속도로 떠오른다. 점점 더 빠르게 떠오른다.
빨라지고 빨라져서 빠르고 빠르고 빠르게.
작가는 멈추지도 좌절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살 수 없는 사막에서도 한 점 꽃을 피우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기에 꽃은 때로 현실적이지 않다. 고통스러운 진실이 슬퍼서 환상을 이용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앞날이 밝다고는 할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교묘한 술책도 점점 대담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정은의 작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을 산다. 구부러지지만 부러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