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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pr 09. 2022

K, 요제프 K, Kafka

카프카 : 성, 소송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성’(1926)을 어려서 읽었다. 조숙했던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는 꽤 유명한 출판사 번역이었는데 오리지널 번역이었는지, 일본어 중역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주 두꺼웠던 건 기억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던 건 이야기가 초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가상이나 환상에 익숙하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처럼 모서리를 돌면 기괴한 장면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말처럼 ‘충격을 주는 것은 그 기괴함 때문이 아니라 사실성 때문’이었다.

소설은 사실 흉내는 냈지만 그로테스크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이런 곳은 없다. 중세도 아닌데 성이 마을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무조건 성에 복종해야 한다. 주인공 K는 토지 측량사다. 성의 백작이 그를 고용했다. 그는 성에 들어가야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다. 성으로 가는 길도 찾지 못한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K는 관리인과 연결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대체 성에는 언제 들어갈 수 있는 건가 궁금했다. 될 듯, 말 듯. 오늘도 내일도 불가능 앞에서 서성인다. 그는 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다. K는 죽을 때까지 목표에 접근하지 못한다. 소설은 미완일 수밖에 없다.   


십 대가 카프카를 읽는다는 건 세상을 심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그 후로 이런저런 책을 읽었어도 카프카에게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는 오래도록 뒷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자유롭지 않았다.

우리는 비밀 서약 같은 걸 맺은 사이다. ‘우리’라니 참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그런데 맞다. 카프카와 나 사이에는 비밀 같은 게 있다. 그를 읽은 사람이라면 동의해주지 않을까. 물론 그가 내게만 그 비밀을 알려준 건 아니다. 그 ‘비밀 서약’은 1대 다수여서 독자 각각은 자신을 유니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카프카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겠지. 독자는 그저 1/N이다.

카프카를 읽어도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흠, 지금쯤 읽었더라면 유행지난 실존주의 문학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사춘기 시절이었으니 다르다. 뭐를 읽어도 깊은 인상을 받을 때였는데 그게 카프카였다는 게 문제였다.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의 변방 국가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는 악마에, 파시스트로 여겨졌다. 게다가 산업화의 물결도 거세게 몰려왔다. 카프카는 ‘발자크는 <나는 모든 장애물을 밀치고 나아간다>는 모토를 지녔지만, 나의 모토는 ‘모든 장애물이 나를 압도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했다. 카프카의 작품 곳곳에는 거대 산업의 여파에 속수무책인 인물들이 장한다. 그는 보험회사에 근무하면서 산재 피해자들를 만났다. 그러나 카프카는 산업만을 악의 축으로 보지는 않았다. 신, 아버지, 제도, 법 등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도 마찬가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가두어 얽고 조이고 부수려는 존재. 그 힘은 보통 ‘악’의 에너지를 지닌다. 작은 개인을 파멸시키는 힘. 사람들은 그 존재를 극복할 수 없다. 처음에는 저항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빨려 들어가 영원한 패배에 이른다.

카프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신이었지만 외딴 섬같은 독일어권 그룹에 속한다. 카프카는 소수 집단 출신이다. 다가 진짜 게르만족의 일원도 아닌 이주한 유대인의 일족이다. 비슷한 시기 체코 보헤미아 출신의 유대인 말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는 카프카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을 남긴다. 자신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는.

카프카는 인간이 원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체득하고 있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일 뿐 아니라 살아 있어도 죄에 물들어있다. 그 죄는 물로 씻어내거나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는다. 죄인은 처벌받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우리의 죄는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무쳐 있다. 아니, 죄인으로 태어난다. 끔찍한 방법으로 죽을수록 속죄에 가깝다.

‘소송’(1925)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이 체포되었음을 알게 된다. 출근 전, 아침잠에서도 깨지 않은 때이다. 단잠을 깨우며 느닷없이 들이닥친 두 형사. 기절초풍할 노릇 아닌가. 무슨 명목인지도 모르는데 체포되다니. 그는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 죄가 없음을 밝히려면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기가 막힌다.

그런데 어떤 죄 말인가.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무죄를 주장하지. 요제프 K는 당국으로부터

'죄 있는 자들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라는 답변만 듣는다. 죄 있음보다는 없음을 밝히는 게 더 어렵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은 용서의 의미를 묻는다. 그건 법원/관청의 하수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합리적 메카니즘 너머 헤아릴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다. 용서는 훨씬 초월적인 존재가 할 일이다.


다음은 ‘성’의 한 구절이다.

도대체 관리 일개인이 용서를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용서라는 건 기껏해야 관청 전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전체 관청도 어쩌면 용서할 수는 없고 단지 판결만을 내릴 수 있을 따름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라고 한다. 법은 매우 성긴 도덕이다. 그 성긴 도덕을 외줄 타기 한다고 도덕적인 건 아니다. 살인, 강도, 사기만 저지르지 않으면 무죄인가. 아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보는 죄, 세상의 부조리한 일도 못 본 척하는 죄, 쓰레기를 버리면서도 또 사는 죄, 썩지 않아 수 백 년 갈 물건을 좋아하는 죄, 죄 투성이다. 죄는 선의 결핍이라고 한다. 그림자만 보고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알려하지도 않는다.

요제프 K는 자기의 죄 없음을 입증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실패한다. 그래서 그는 인적없는 채석장에서 잔혹하게 처형당한다. 소설에서는 총에 맞아 죽고 오손 웰스의 동명의 영화(1962)에서는 칼에 찔려 죽는다. 어쨌든 집행자들에게 사형당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카프카는 ‘우리는 신의 머리에 떠오른 허무 의지적 사고들이자 자살적 사고들이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 ‘암,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이 있지.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라고 말했다.

니체는 우리에게 원죄의식이 있는 건 전부 종교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가 우리를 가녀리고 미천한 신분으로 전락시켰다고 했다. 그의 초인 이론이 여기 맞닿아 있다. 기존의 인간들은 너무 작고 사소하고 슬프다는 거다. 카프카는 노예근성의 본질을 이해한다. 그리고 거부하려고 한다.

장편, 단편, 편지, 일기 등 카프카가 남긴 우울이 전염병처럼 나에게도 옮겨왔다. 환자가 되었다. 한동안 그의 고독을 스펀지처럼 빨아 들었다. 그 누구도 카프카만큼은 데카당스 하지 않았다. 이 작가처럼 독자를 매혹시키고 쓸쓸하게 하기는 어렵다. 카프카는 유 U자형 곡선 맨 밑이다. 카프카 때문에 많이 다운되었었지만 그다음은 그런대로 상승이다. 그래서 단단해진 측면이 있다.

카프카로 인해 다른 세상을 발견했던 이들이 많다. 몇 줄 옮겨본다.

알베르 카뮈
우리들은 여기에서 인간 사고의 한계로 나아간다. 그의 작품에 있는 모든 것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적이다. 이것은 모순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으면서 어떤 것도 확증해 주지 않는 것은 운명이며 아마도 그의 작품의 위대성일 것이다.

토마스 만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자주 꿈의 성격 속에서 완전히 구상되고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이 꿈의 바보짓을 정확하게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비웃음, 보다 높은 동기에서 나온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카프카의 이 응시들은 세계문학이 산출해낸 가장 읽을 만한 작품으로 평가될 것이다.

앙드레 지드
그의 像들의 현실주의는 언제나 상상력을 초월하고 있어서 내가 무엇에 더 경탄하는지, 즉 像들의 면밀한 정확성을 통해서 믿게 되는 환상 세계의 ‘자연주의적’인 재현에 경이를 느끼는지, 아니면 비밀에 찬 것에로의 전환의 대담성에 더 경이를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게오르크 루카치
프란츠 카프카는 맹목적이고 공포에 싸인 불안에 지배된 현대 작가의 고전적 사례이다. 그가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이 기본적 경험을 전달하는 직접적이고도 단순한 방법을 발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형식적 실험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이 방법을 발견했다. 여기서는 내용이 미학적 형식의 직접적인 결정요인이 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에 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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