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다는 건 내 감정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이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솔직하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위험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속을 털어놓지 않는 음흉한 이들보다 나을 것도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솔직함과 감춤의 예술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열정’(2008)을 보면 솔직함이 관계를 파탄에 빠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 친구ABC가 있다. 오늘은 A가 D와 결혼을 선언하는 날이다. 그런데 A는 그다지 기쁘지 않다. D의 강요에 마지못해 발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관계’의 의미를 묻는다. ABC 전체는 AB, AC의 부분집합과 당연히 다르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시너지 효과가 달리 미친다. 셋이 공유할 화제가 있고 그중 둘 만이 말할 것도 있으니까.
ABC는 B와 사귀는 E의 집에 간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진실게임이 벌어진다. 둘 사이의 비밀이었던 일도 들추고 들춰진다. BE는 뜨뜻미지근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A도 E와 사귄 적이 있고 B는 D를 사랑한다. ABC는 오래도록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감정을 열어보니 앞으로는 좋은 친구로 남지 못할 것 같다. BC는 A에게 적대감이 있다. A가 자신을 뚜렷이 밝히지 않고 늘 모호하게 감춘다고 공격한다. 게다가 A가 D에게 감정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C도 남을 비난할 만큼 이성적인 인물은 아니다. C는 E의 친척인 F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C의 아내는 현재 출산을 앞둔 처지다. C는 F와 재회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E와 격렬한 정사를 벌인다. A는 그걸 지켜봐야 한다. 그렇다고 E가 ABC 중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현재 감정에 충실하다.
B는 A가 없는 틈에 D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E와의 관계에 실패한 A는 D에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집을 떠난다. 그러나 곧 다시 돌아와 D에게 사과하고 D는 A를 받아들인다.
울퉁불퉁하는 한 때의 열정일까. 감독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일관성이란 건 없다고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의 미학을 믿는다. ‘본래 아무 상관이 없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을 영화에 아로새기고 싶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우연을 화면에 정착시킬까 고민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저 일시적인 감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진실게임에서 진실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그 순간에는 의미가 있을지라도 잠시 후에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누군가에 대한 감정은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영원하길 믿고 싶지만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다. 좌와 우, 선과 악, 성과 속 사이의 그 스펙트럼 어딘가에 잠깐 위치하다 사라진다.
몰리에르(1622~1673)의 풍속/성격 희극 ‘인간 혐오자’(1666)는 솔직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연극에는 극단적인 두 인물, 알세스트와 셀리멘이 출연한다. 남자 주인공 알세스트는 인간 혐오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위선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뒤에서는 남을 미워하고 험담하지만 앞에서는 적당히 말을 둘러대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도무지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다. 지위 높은 삼류 시인에게도 너무나 진솔한 평가로 상처를 주어 소송에 휘말려 있다.
알세스트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셀리멘이라는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 주위는 미녀를 흠모하는 남자들로 북적인다. 물론 알세스트는 셀리멘이 사랑하는 이는 자기라고 착각한다. 왜 그녀가 자기의 진심을 만인에게 밝히지 않는지 애가 탈뿐이다.
셀리멘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혐오자 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건지 남녀 관계에 관한 한 두리뭉실한 전략을 택했다. 이 남자는 이래서, 저 남자는 저래서 괜찮다. 아니, 이 남자는 이래서 저 남자는 저래서 싫은지도 모른다. 애교와 험담으로 무장한 어장 관리자라는 게 맞다. 누구 한 명 콕 찍어서 좋다, 싫다 명백하게 표현하면 하나 둘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셀리멘은 말 대신 서명 없는 편지를 보내 각각의 남자를 달래고 어른다. 이 남자에게는 저 남자를 흉보고, 저 남자에게는 이 남자를 흉본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을 셀리멘의 진정한 애인으로 생각한다. 알세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는 법. 남자들은 셀리멘에게서 받은 편지를 서로 비교하다가 이 여자의 수법을 알게 된다. 화가 난 구혼자들은 일제히 셀리멘을 비난하고 돌아선다. 셀리멘은 모두를 속인 희대의 사기꾼이 된다. 알세스트는 슬픔에 빠진 셀리멘에게 세상을 멀리 떠나 둘이서만 같이 살자고 한다. 그러나 이 재미있는 곳을 떠날 셀리멘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이곳에서 즐길 만한 것들이 많다. 알세스트는 셀리멘과 자신을 모두 저주한다. 인간 혐오가 완성된다.
완전무결한 도덕성란 게 존재할까. 알세스트라는 인물은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자신만이 아니고 타인에게도 극단적으로 요구한다. 그는 '사람의 자질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네'라고 말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반사교적이라기보다는 반사회적 인물에 가깝다. 그에 의하면 솔직한 사람은 안과 밖이 일치한다. 그러나 알세스트 역시 지향점은 그럴지언정 행동은 따르지 못한다. 위선적인 사람을 경멸한다고 외치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거짓투성이다. 모순에 빠진 인물임에 분명하다. 속물을 사랑하는 고결한 남자,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누구든 자기 합리화에 능하다. 알세스트도 셀리멘도 다 자기식의 핑계가 있을 거라고 본다.
감정은 일시적이다. 순간순간 다르다. 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의 낭만시는 걷기에서 나온 성과이다. 윌리엄 터너(1775~1851)나 존 컨스터블(1776~1837)의 작품에는 감정이 넘실댄다. 오래도록 진지하게 자연을 관찰한 이들은 그곳에서 개념이 아닌 경험과 직관으로 사유하는 법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나 자연이 계속 변하듯 감정 또한 그렇다. 우리의 조건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일관적인 가치관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감정이 일시적,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선택이 얼마나 옳을지 속단하기는 어렵다. 자기식으로타인을 판단하고 정직이라는 미명 아래 그것을 즉시 밝히는 건 어리석다. 물론 셀리멘의 가식적인 삶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녀는 타인의 관심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관종이다. 17세기 몰리에르의 인물들이 오늘날에도 와닿는 건 인간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열정’이나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자’는 인간관계의 진실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 신중함이나 중용이 필요하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마음을 접고펴는 데에 능하다. 위선적이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관계의 달인이다. 그 어떤 기술보다도 삶을 풍요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