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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May 17. 2022

서서히 퇴락한다

우연과 상상, 플로베르 '감정교육'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2021)을 보았다. 세 개의 중편을 묶은 영화인데 세 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 배우가 낯이 익었다. 얼마 전 보았던 같은 감독의 ‘열정’(2008)에서도 나온 인물이었다. 카와이 아오바라는 배우였는데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열정’을 불과 며칠 전에 보았을 때 그녀는 긴 머리와 세련된 옷차림으로 빛나던 젊은 여자였다. 며칠 만에 13년의 세월이 흘렀고 같은 배우의 미래를 확인했다. 이제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을 회고하는 중년 여성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 그녀는 ‘시간이 서서히 나를 죽이고 있다’고 말한다.


오래도록 봐 온 배우들이 있다. 인터넷에는 사진도 많아 자연스럽게 또 익숙하게 수 십 년에 걸친 그들의 변화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일본 배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선 이였다. 갑자기 나타난 두 편의 영화가 시간 여행의 전후를 보여주었다. 영화 내용보다는 ‘시간이 서서히 나를 죽이고 있다’는 그녀의 대사가 그처럼 실감 나게 다가올 수는 없었다.


귀스타프 플로베르(1821~1880)의 '감정교육’(1869)은 일종의 역사물이다. 에밀 졸라도 ‘내가 읽어본 유일한 역사소설’이라고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시간이다.

‘감정교육’에는 대하소설에 익숙한 영웅 다움이나 비장함이 없다. 작품은 ‘음울한 희극적 회의주의’에 입각해 있다. 나폴레옹 3세시기는 당시 프랑스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비극이나 드라마틱과 거리가 멀다. 독점 자본주의 사회의 유한계급자들, 금리생활자들은 실체없는 욕망을 배회한다. 그들의 수동적인 삶 또한 환멸로 막을 내린다. 적어도 플로베르와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계속 부침을 거듭해온 소모와 허비의 결정판이다. 


19세기 사람들은 운명 개념이 아닌 시간 개념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시간이 삶을 좀먹어 들어간다는 인식에 사로잡혔다. 시간은 인간을 피폐하게 하고 파괴하며 집어삼키는 원칙이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플로베르가 ‘주인공의 과거에서 아무 에피소드나 하나 골라내서는 그것이 아마도 그가 삶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경험이라고 말한다'고 평했다.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하잘것없고 공허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을 이어주는 사슬에는 항상 어느 한 공리가 빠져 있고 객관적 무의미와 순전히 주관적인 의미가 안겨주는 서글픔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정교육'은 우울하고도 허무한 인생관이 빚어낸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시작도 하기 전, 플로베르는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쥐꼬리 결말, 그들 셋(프레데릭과 아르누 부부)은 그들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감히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감정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들은 이별한다. 결말: 그들은 이따금 서로 만난다. 그리고 죽는다.’

주인공, 프레데릭 모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2제정기 시대의 인물이다. 입헌군주제 시대이지만 공화주의자들이 혁명을 부르짖던 시대여서 사회적으로 갈팡질팡하던 때이다. 그도 보봐리 부인과 마찬가지로 '피로한 문명'의 자식이다.

신분보다는 돈이 먼저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부르주아의 힘이 커지면서 신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는 시대다. 홉스봄의 분류를 따른다면 19세기 중에서도 '자본의 시대(1848~1875)'다. 프레데릭은 지방 귀족의 후예이며 부르주아이니 적당히 갖춘 사람이다. 금리 생활로 평생 편안하게 살았던 플로베르의 소설 속 변신이다.

프레데릭은 처음에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나 학자가 되는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예술품 매매업자나 주변 예술가 친구들과의 관계로 봐서 예술가가 되겠거니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세상이 그랬다. 무엇하나 관심을 기울일 만큼 대단한 것도, 단단한 곳도 없다. 책에 나온 부분만으로 볼 때 프레데릭이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연애다.

연애는 프레데릭 모로 일생의 줄기찬 목표며 수단이다. 연애를 통해 세상을 배웠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성 풍부하던 이 인물도 피로한 세상을 경험하면서 감정이 매말라가고 연애에도 관심을 접게 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자신의 감정을 계속 소모하고 살았으니 남아있을 것도 별로 없으리라. 연애박사 프레데릭, 세상이 그를 타락하고 번민하고 닳아빠지게 했다.

처음 만난 여자는 유부녀 마리. 속물 아르누의 부인이다. 십 대 후반 소년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인물이다. 그녀는 프레데릭에게 여신이다. 시대와 제도에 희생당하는 삶을 살고 있으나 자기 절제가 강하다. 프레데릭은 평생 그녀를 애모해 마지못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다가설 수 없는 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는 어차피 닿을 수 없기에 대안이 필요하다. 진정한 미는 만질 수도 심지어 닿을 수도 없다는 상징으로 등장한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 정도로 마리 아르누는 고결하고 고상한 인간의 전형이다. 마리는 19세기의 구식 여자로 정치적 견해나 여권 의식조차 없지만 당대 특유의 여성성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그 외모, 결단성, 의지 등 부러운 요소가 많다.

마리는 죽을 때까지 감정을 닫고 묻어버린다. 그런 건 너무 사치스럽고 조악하다. 그녀에게는 하찮은 찌꺼기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가족, 남편, 아이들, 품위, 도리, 우아함 같은 것. 그러나 가식적이지 않은 이유는 이 부인이 진심으로 그 가치를 지켜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신념이 그렇다.

프레데릭의 두 번째 여자는 로자네트다. 그녀는 창녀에서 출발해 코티잔으로 살아간다. 로자네트는 남자들의 애인, 첩 등으로 살면서 집, 용돈, 옷, 가구, 장식품 등을 얻어낸다. 그녀 역시 시대의 희생양이다. 가난한 구제불능 부모가 딸을 팔아넘긴 바람에 어린 나이에 몸을 파는 세계로 들어온다. 그러나 타고나 재치, 미모, 호기심 덕분에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애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로자네트는 첩으로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아르누의 애인이 된다. 그러나 아르누가 영락하면서 프레데릭의 애인이 된다

프레데릭으로서는 아르누 부인이 자신에게 육체적 만족을 주지 못하기에 적극적인 대안이 필요했는데 그때 등장한 인물이 로자네트다. 그녀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사회 상류층,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알게 된 상식, 정보 등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녀는 프레데릭을 사랑한다. 그녀의 잘못이라면 이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거다. 프레데릭은 이 여자가 역겨워진다. 다른 여자들처럼 평범해질 테니.

프레데릭으로부터 버림받은 로자네트는 다시 옛 영감의 후처가 되어 평범한 후반기를 보내게 된다. 코티잔으로서는 종말이지만 그녀로서는 최고의 선택이다. 프레데릭도 로자네트와의 결혼 따윈 원하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았다. 그녀 계층을 향한 지식 계급의 대우란 이런 것이다. 가지고 놀다가 싫증 나면 버린다는 게 정확하다.

세 번째는 당브뢰즈 부인이다. 유명한 사업가, 은행가의 부인이다. 대단한 협잡가이며 권모술수에 능한 비선 실세다. 이런 재주로 남편을 도와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화사하고 오만한 여성이다. 사교계의 거물들은 애인을 두는 일이 흔했는데 당브뢰즈 부인은 절대로 자신이 먼저 구애하지 않고 상대가 저절로 다가오는 전략을 썼다. 프레데릭 역시 그녀의 매력에 포위당하고 만다. 남편이야 사경을 헤매건 말건 관심은 돈과 애인뿐이다. 그녀는 먹이사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채는 사냥꾼다운 후각을 지녔다. 먹이를 행해 날렵하게 달려들기, 그게 인생 전략이다. 타인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데에는 프로다. 그러나 재산과 정열, 지략도 사랑 앞에서는 헛되다.

여자들과의 세계대전을 치른 후, 이 남자는 시들어버렸다. 멋진 가구, 그림, 책들에 둘러싸여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낱말을 추억하며 세상을 소모할 것이다. 먼지만 내리는 고요한 일상, 퇴색이 그를 기다릴 것이다. 늙기보다는 낡아가겠지.

과거의 가치가 모두 사라진다. 아우라, 고상한 과거, 신화, 인류의 기억이 모두 판매 대금으로 결재되기 시작한다. 돈이 모든 것을 결재한다. 사랑도, 고귀함도, 우아함도, 멋진 관계도 돈이 없으면 하찮고 보잘것없다. 플로베르는 이 책을 ‘내 세대 사람들의 도덕의 역사’라고 했다. 작가는 ‘우리는 인생을 말하기 위해 태어났지 소유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손안에 잡은 것도, 잡을 것도 없다. 그래서 작품에는 ‘비정함’이나 ‘삶의 포기’와 같은 허무가 기저를 이룬다. 이게 리얼리즘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플로베르 시대의 예술가, 사상가, 혁명가들은 살아남았을까. 작가는 아니라고 답한다. 화가는 사진사가 되고 사상가들은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예술가 지망생은 평생 여자 좇기에만 바쁘다. 혁명가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 다른 노동자를 착취하고 그를 죽이기까지 한다. 프레데릭이 플로베르다. 플로베르는 시대를 알고 있다. 그는 전근대적 현대인이다. 이제 가치가 종이처럼 얇아지고 가늘어지다가 다 비치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의 글은 중의가 없이 말하는 만큼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계처럼 영혼 없이 하늘거린다.

소설의 끝은 말할 수 없이 허무하다. 피천득의 ‘인연’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못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


마지막 만남에서 중년이 된 아르누 부인은 자신을 내맡긴다. 프레데릭은 흰머리 수북한 그녀를 더 이상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자신이 느낄지도 모르는 혐오감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를 어리석게 만들지 말자. 그는 아르누 부인에게 연민을 느낀다. 프레데릭은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연애에 지진 프레데릭, 당신 이후로도 마찬가지라오. 영혼은 없고 결재 영수증만 쌓인다오.

이 책을 읽고 당대의 어떤 독자는 ‘줏대 없이 웅크린 채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미숙한 세대의 낭만적 몽상에 대한 경멸을 담은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시간이 가고 또 간다. 19세기 사람들은 시간이 가져오는 우스꽝스러운 변화에 눈을 떴다. 

21세기 사람들도 괴물 같은 시간에 대해 잘 안다. 우리는 클로즈 업과 하이퍼리얼의 대가들이다. 그러나 시간은 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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