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전쟁터에서도 꽃 한 송이쯤은 바람에 흔들린다
가족시네마, 제로K
부모님 묘소에 갈 때면 현대적 질서 집착에 뜨끔해지곤 한다. 예전 묘지들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크고 작은 묘지 앞에는 오래된 동자석이나, 비석들이 뒹굴곤 했다. 지금 보이는 저 산소들은 일사분란하다. 봉긋봉긋 줄지어 솟아 있는 모습에 인위적 공평함을 확인한다. 마치 대도시 아파트나 다름없는 정신이다. 누워있는 공간이라고 봐야 기껏 관 크기이니 더 큰 건 의미도 없을 테다. 언덕 위에서 묘소가 펼쳐져 있는 아래를 보자니 웅장한 느낌마저 든다. 몇 개월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이 참 많다. 작년에는 빈터였던 곳도 지금은 거의 채워졌다.
아래로 내려와서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산소가 층층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꽃들. 빨갛고 노란 꽃들이 산소 앞 돌 화병에 담겨있다. 역시 평등하게 산소 하나당 돌 화병이 두 개씩 서 있다. 아아, 플라스틱의 물결. 처음에는 화병에 조화를 꽂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가을 산소에 가면 봄에 꽂은 꽃의 색이 바래 있으니 바꾸어야 했다. 쓰레기통에는 이미 엄청난 양의 가짜 꽃들이 있었다. 빛바랜 꽃들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원래 수명이 없다. 원래 가짜였으므로 살아본 적도 없다.
조화 꽂는 일을 좀 신중하게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일이다. 내 부모님 산소를 장식하든 말든 그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전체를 바라다볼 때 한 집에만 조화가 꽂혀 있지 않다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다. 한국식이다. 죽어서도 남을 의식해야 하나.
그래서 한쪽 화병에만 생화를 꽂기로 했다. 아직 잔디가 파래지기 전이다. 무채색 초 봄, 묘지 앞 조화들은 초봄이지만 울긋불긋하다. 물론 우리 부모님 산소만 빼고. 한쪽 화병은 아예 비워두었다. 다른 쪽은 지난가을 꽂아두었던 가을 국화가 처량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누런 갈대처럼 앙상한 윗부분은 손으로 톡 건들자 부서져 내렸다. 아랫부분은 검게 썩은 채 며칠 전 온 비에 담겨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한쪽에라도 조화를 꽂아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두 쪽 다 꽂는 게 맞다고 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묘처럼 보인다는 거다. 이 작은 일에도 의견이 다르다. 부모님은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장식물은 자연에 반항하는 플라스틱이다. 그 반-자연물이 자연 행위를 방해한다.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1997)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오래전 금이 간 가족이 있었다. 이들은 둘째 딸의 배우 경력을 돕기 위해 다큐 영화에 출연한다. 일행은 촬영 중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기로 한다. 큰 딸 모토미는 벌거벗은 어머니를 유심히 바라본다. ‘마흔다섯 살 기념이라며 수치심 한 조각 보이지 않고 유방을 풍만하게 수술한 어머니.’다. 그녀의 ‘실리콘을 주입한 유방은 물에 가려 있지만, 쇄골 바로 아래부터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리콘 유방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비유다. 실리콘은 불모의 상징이다. 썩지도 않지만 발아도 불가능하다. 단지 흉내에 불과하다.
모토미는 인간이 그립다. 가족은 대화, 숨, 땀으로 얽힌 조화와 화해의 공간 이어야지. 그러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없구나. 어머니는 성과 환락에, 아버지는 돈과 가부장이라는 힘에 몰두해 왔다. 질서나 절제가 무너진 지 오래된 집안이다. 그 때문일까. 여동생은 포르노 배우가 되었고 천재 남동생은 은둔형 외톨이로 산다. 파친코 업계에서 퇴출될 위기에 몰린 부친도 한결 연약해진 모습이다.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그러나 모토미는 관계 개선이 헛되다는 걸 깨닫는다. ‘아버지의 폭력에도 어머니의 성적 방종이 초래한 치욕에도 우리는 그럭저럭 견디어 왔다.’ 모토미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한다.
돈 드릴로의 ‘제로 K’(2016)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냉동인간이 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제로 K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그 이행을 돕는 유닛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 냉동 회사의 죽음 유도기계 브랜드 명이다.
작가는 이 냉동 회사의 정원을 묘사한다.
'이곳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 나무, 관목, 꽃식물이 있었다. 서서 바라봤다.……이곳이 사막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다듬은 산울타리, 음지나무, 격자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들장미까지 제대로 갖춘 영국식 정원임을 묵묵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무껍질, 풀잎, 온갖 종류의 꽃, 이 모든 것이 코팅하거나 에나멜을 칠한 것처럼 희미한 광택을 띠었다. 이중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었고 그 모두가 정원을 쓸고 가는 산들바람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북쪽 어딘가에 사막이 있다. 그곳에 원대한 수명 연장 계획을 가진 회사가 있다. 그곳의 기획자는 인체 냉동 보존술로 사람들에게 영생을 선사하고 싶다. 정원은 한 포기의 풀과 꽃도 허락하지 않는 불모지이다. 기획자는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이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겁니다. 이곳은 달로 환생한 이 행성의 후생이에요. 인공적인 재료들, 유물 같은 정원.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생명과 특별한 관계가 있죠’라고 말한다.
어차피 가짜인데 왜 정원의 꽃과 나무는 진짜를 닮아야 하나. 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모양일 필요는 없다. 어떤 형태든 무슨 상관일까. 진짜를 닮게 만든 건 모방보다는 노스탤지어 아닐까 한다. 원조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은 소중하다는 걸 인정하니까. 그러나 인공이라야 영원하다는 건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제로 K’를 읽다보면 몸서리쳐지는 부분이 많다. 위의 인공정원은 영생에 대한 냉동회사 기획자의 심리를 닮았다. 그는 감정이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다시 살고 또 살아도 같은 곳, 같은 장소에 앉아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회고하려 한다. 아마 계속 같은 장면을 꿈꿀 것이다. 죽은 자들을 방부 처리하는 장면들보다 더 끔찍한 부분은 바로 이 장면이다. 인물은 유리섬유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과 나무에 앉아 거듭되는 삶과 삶을 회고할 것이다. 그의 얼굴은 무미건조하다. 표정이 있을 이유도 없다.
자로 잰 아파트에서 살다가 역시 치수 정확한 곳에 들어가 줄지어 잠들어야 한다. 그 앞에는 가짜 꽃들이 철철이 바뀐다. 꽃들은 썩지 않는다. 자연스럽지 않다.
유미리의 ‘가족시네마’에는 ‘어떤 전쟁터에서도 꽃 한 송이쯤은 바람에 흔들린다’라는 아주 서정적인 문장이 나온다. 그 꽃 한 송이만큼은 진짜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