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죽음
The Last Word,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기 전의 분투를 그린 작품들이 종종 있다. 그중 마크 펠링톤의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2017)이라는 영화와 톨스토이 작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4)를 골라 보았다. 전자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이고 후자는 러시아 거장의 작품이다. 전자는 코믹하고 후자는 세상 어느 작품보다도 심각하다. 그러나 양쪽 모두 생각해볼 점이 있었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의 원제는‘The Last Word’,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 유언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해리엇은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유명 인사이므로 부고란에 이름이 오를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기자가 써주는 대로 자신의 삶이 요약, 해석되는 일은 피하고 싶다. 죽는 당사자가 주인이 되어 부고란을 기획하고 싶다. 영화는 특별한 캐릭터를 지닌 해리엇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에 빠뜨리고 죽는다는 이야기다.
해리엇은 사망기사의 조건을 제시한다. 즉 제대로 된 부고란은 동료와 가족의 칭찬이나 사랑, 누군가에게 우연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드러내야 한다. 그 외에도 사망자 특유의 와일드카드를 밝힐 수 있다면 더 좋다.
해리엇의 부고를 맡은 기자는 앤이다. 죽은 이의 삶을 대충 조사하고 후하게 점수를 주어 부고란을 작성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다. 물론 아무도 감동하지 않는다. 읽을 필요도 없이 그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거짓이다. 읽는 이나 쓰는 이 모두 기사의 내용이 가짜라는 걸 안다.
앤의 진짜 글은 따로 있다. 그녀는 자신의 에세이 모음집에 ‘안달루시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달루시아’라고 명명한 것은 실제의 고유지명을 의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해리엇은 앤의 글을 비판한다. 현실성이 없는 소녀 취향의 감성을 짜깁기한 글이라는 것. 아픈 지적이지만 사실이다. 해리엇은 앤에게 ‘우연한 영향력‘을 끼친다. 영화 말미에 앤은 안달루시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녀는 '현재'의 자신 그리고 안달루시아를 만날 것이다. 과거, 환상, 망상, 이미지 병치에서 벗어난 진짜 세상. 해리엇은 앤의 글쓰기에 방향을 제시했다. 선배는 길을 잃은 후배에게 불을 밝혀주는 등불이 된다.
해리엇은 관점과 논리가 있는 인물이다. 흐르는 대로 방향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기획한 대로 나아간다.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기획한다. 축복받은 천재로서 남들은 지니지 못한 그녀만의 와일드 카드를 지녔다. 그녀는 세상이 가는 흐름을 바라보고 방향을 예측한다. 그녀는 의도한대로 인생을 살았다.
유명 인사들은 참 어렵겠다. 죽은 다음의 평판까지 고려하느라 마지막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한다. 완전한 부고란에 들어맞는 멋진 인생을 제조한다. 코믹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4)에 나오는 이반 일리치와는 대조적이다. 그는 인생철학에 큰 의미를 두고 살아본 적이 없다. 평범, 혹은 비루한 보통 사람이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는 좀 더 깊은 내부를 들여다본다.
이야기는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받아 든 주변인들의 반응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나의 일이 아니므로 감사하고 심지어 기뻐한다. 동료들은 이 남자의 죽음 후 있을 직장 내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관심이 있다. 아내 또한 남편 사망 후의 연금이나 지원금 등을 계산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백한 앞날도 부정한 채, 비열함, 연약함, 그리고 어리석음 따위를 드러낸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육체적 변화를 따라간다. 이와 더불어 주인공은 삶에의 깊은 통찰에 이르게 된다. 내면의 평화를 이룬 채 죽음을 맞이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성스럽게 느껴진다.
처음 죽음을 선고받았을 때, 이반 일리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직은 꽤 젊고 건강하다고 자부해왔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그에게는 가족, 동료, 친구가 있다. 모두 그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자평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분노하고 슬퍼했으나 점차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과 같은 전형적인 죽음에의 단계를 거친다. 그러면서 친숙했던 것들과 서서히 멀어져 간다. 그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때로는 타성에 젖어 삶을 마구잡이로 살아낸 때도 있었다. 그는 사법 관료로서 출세했고 가정적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병상에 홀로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이가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결국 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거다.
유쾌함, 우정, 희망이 꿈틀대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그리고 사랑과 추억이 뒤를 잇는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었고 좋은 시절은 드물어졌다. 그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좋은 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삶이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반 일리치는 누구나처럼 행복을 추구해왔다. 그것은 항상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였다. 죽음을 앞에 두고 보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위선과 욕망이 가로막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건강할 때는 화려하고 품위 있는 이들로 둘러싸인 삶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 진심으로 그를 보살피는 이는 가난한 하인뿐이다. 깨닫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다룬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리라 작정한다.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타인을 위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편한 대로 아무 이야기나 하고 횡설수설한다면 공허한 소음이나 다름없다고 여긴다. 미국식 공리주의에 걸맞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이타주의와 윤리의식이 공허하게 메어리 친다.
반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자신이 지나온 삶이 허영과 거짓 투성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쓰디쓴 인생의 뒷면을 알아챈다. 그리고 낮고 허름한 곳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한다. 심연 앞에선 남자, 자신을 돌이키는 일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두 작품 모두 생각할 점이 많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러나 좋은 삶에 필수적이지 않을까 한다.